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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단상] 한옥 마당. 삶의 균형추

기사등록 : 2016-11-1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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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광활한 대자연 속을 떠돌며 수렵과 채취를 하며 살던 구석기 시대와 정착을 해 농경 위주로 살던 신석기 이후의 시대를 ‘가둠’이라는 개념으로 구분해 봤었다. 너무 평이해서 나이브하더라도 객관적이며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토인비가 말한 세 개의 물결 중 제1의 물결인 농업혁명이 가둠의 시기의 시작과 일치할 것이다. 제2의 물결인 산업혁명과 제3의 물결인 정보혁명 역시 가둠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금 우리 사회는 3차 산업혁명을 너머 4차 산업혁명으로 가는 과도기라고도 한다. 증기기관에 의한 혁명이 1차, 대량생산 방식에 의학 혁명이 2차, IT에 의한 것이 3차라고 한다면 인공지능에 의한 혁명이 4차 산업혁명이다. 제3의 물결인 정보혁명이나 이 네 개의 산업혁명의 사회 모두 성격 규명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넓게 보아 가둠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류사의 장구한 역사를 가둠의 이전과 이후로 양분해 바라봐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대도시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파트 문화에서는 불가능한 것인데 옛날의 한옥에서는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살던 한옥의 마당엔 가끔 올가미가 설치되었다. 소쿠리를 막대기로 받쳐놓고 그 안에 먹이를 놓는다. 막대기엔 줄이 매어져 멀찌감치에서 형이 그것을 잡고 있다. 참새가 마당에 날아와 미끼를 먹으려 소쿠리 안에 들어가는 순간 줄은 당겨진다. 막대기가 넘어지며 소쿠리가 덮쳐 참새가 잡히는 것이다. 형은 번번히 실패했지만 곁에서 바라보던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때는 단순한 놀이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가둠’ 이전의 수렵 시절을 재현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즉 수십만 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인류의 삶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마당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켠의 텃밭엔 상추와 고추, 가지가 심겨 있었다. 상추를 따 와 밥과 된장을 버무려 싸 먹었다. 화덕이나 곤로에 솥을 올려놓아 고구마를 찌거나 콩을 삶았다. 삶아진 콩은 절구에 찧어져 메주의 재료가 되었다. 채취 시절에 있던 삶의 연장이며 가둠 이후의 농경 생활과 맞닿는 풍경이다.

그뿐인가.

마당에 놓인 평상에선 라디오를 듣고 더운 날엔 선풍기를 틀었다. 지금이라면 스마트폰 검색도 할 수 있다. 이런 일들은 물론 산업 혁명 이후의 풍경으로 아파트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올가미를 놓아 참새를 잡는 일은 아파트에선 전혀 불가능하고 상추나 고추를 재배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사소할뿐인 옛집의 흙마당은 이처럼 상상의 옷을 조금만 입혀도 인류사의 압축판이 되어 한없이 깊고 풍성해진다.

그 평상에서 언젠가 인공지능 로봇이 아양을 떤다면 최첨단인 산업혁명의 물결까지 들어선 셈일 것이다. 말하자면 인류의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장구한 삶의 형태들이 자그마한 흙마당의 집에 골고루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음주 문화엔 두가지 문화가 섞여 있다는 말이 있다. 술잔을 돌리는 것은 유목민 문화, 술잔에 술을 따르는 것은 정주민 문화라는 것이다. 즉 유목민들은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기에 식사나 음주를 급히 해야했고 그릇이나 용기 또한 되도록이면 가벼워야 했다. 하나의 잔으로 돌려 먹는 것이 유리하다. 반면에 정주민들은 한 곳에 느긋하게 살아가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 사람들마다 자기 잔을 가지고 서로 따라 주는 예의와 멋스러움이 생긴 것이다.

한옥 마당에서 숯불에 석쇠를 놓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술을 마실 때면 그 두 가지 즉 흙마당에 녹아 있는 유목적이며 정주민적 문화, 술잔에 어려 있는 유목민적이며 정주민적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다. 그런 이면의 함의들을 읽으며 마당에서 술잔을 돌리거나 술잔에 술을 따라 마시면 술맛이 한층 고조될 것이다.

현대 철학의 주된 흐름 중 하나가 유목민적 삶을 강조하는 건데 이런 큰 범주에서 보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인류가 정주민적 삶을 산 기간은 기껏해야 만년 정도이다. 그리고 1차 농업혁명을 거치고 2차 산업혁명을 거치고 3차 정보혁명에 들어선 다음 거기서도 4차의 인공지능 혁명까지 가고 있는 지금 세상은 사람들을 가둔채 너무도 빡세게 돌아간다. 물론 지구상의 무수한 문명체들이 동일한 궤도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제각기 이질적인 흐름들이 있지만 큰 맥락으로 볼 때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개체인 인간들은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자유를 빼앗기는 느낌이 들며 문명의 구속에 지치고 고달파진다. 각종의 체제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색깔에 따라 구성원들을 옥죄인다. 삶의 곳곳에 그러한 구속과 억압이 뻗쳐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안으로서 유목민적 삶이 나온 것인데 인류사의 거대 범주에서 본다면 가둠 이전의 시기로 되돌아가자는 취지이다. 물론 삶 자체가 아니고 철학적인 옷을 입은 양식으로서 말이다.

이런 정황을 놓고 볼 때 가슴 아프게 떠오르는 것은 특히 학교이다.

아파트에 주로 살던 아이들은 좀더 자라면 학교에 들어간다. 학교 생활은 각종 커리큘럼들로 차 있다. 아이들은 물론 운동장에서 놀기도 하고 뜀박질도 한다. 그러나 턱없이 모자란 실정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제대로 놀기도 전에 부모들에 의해 불려가 별의별 학원에 넣어진다. 영어 학원, 수학 학원, 음악 학원, 태권도 학원 등등 이 모두가 또하나의 가둠의 방이다. 물론 그 명암의 양면성이야 있는 거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 볼 땐 속박이며 구속이기 쉽다.

사회가 왜 이렇게 돌아가고 학교 제도는 왜 이렇게 돌아가는가. 부모들의 의식 또한 왜 그런가.

진화심리학을 빌려 말을 하자면 사람은 구석기 시대의 장구한 상황에 심신이 길들여져 있다. 산업 혁명 이후에 특히 가파른 속도로 발전해와 지금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 인간의 심신은 적응이 덜 되어 있다. 아직도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유목민적 생활을 하던 습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적인 삶과 불협화음을 빚을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해서 만들어낸 가둠의 개념이나 현대의 주요 철학자가 말하는 유목민적 삶의 필요성 등과도 매치되는 부분이다. 어른들이 그럴진대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사랑스런 자식들 아닌가.

마당이 있고 골목이 있고 마을과 친구와 이웃들이 있는 한옥 문화보다 아파트 문화가 나은 점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아이들은 흙이 필요할 것이다. 일체유심조 운운하며 마음이 곧 흙이며 마당이며 하늘이라고 반격이 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물질 내지 자연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마음은 어지간하지 않으면 위태롭게 흔들리기 십상이다. 기반은 있는 것이 좋다.

집에서 충분히 해주지 못하기에 학교에서라도 보강해줄 필요가 있다. 학교의 운동장에서 실컷 놀도록 하자. 더 나아가 학교에 텃밭도 풍족히 일구어서 아이들이 감자나 고구마, 상추, 딸기, 토마토 등등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기쁨을 갖도록 하자. 아득한 옛날에 초원을 야수처럼 달리듯 운동장을 달리게 하고 텃밭에서 흙의 느낌을 친구들과 진하게 나누도록 하자.

흙만이 아이들에게 균형을 줄 수 있다. 아파트 문화로 인해 유아기부터 균형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우리들의 사랑스런 아이들에게 흙마당을 풍부하게 선물하자. 삶의 균형추가 되도록 하자. 교육 제도를 과감히 바꾸되 가둠 이후의 사고에 막힌채 하면 절대 안되고 가둠 이전과 이후 그 전체의 인류 문화를 인류학적, 철학적으로 제대로 사유한 상태에서 말이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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