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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 없는 ‘고시촌’…아듀 사법시험

기사등록 : 2017-06-2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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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강의서 사시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어
사시 빈자리, 경찰과 7·9급 공시족이 채워
헌책 희비···잘나가는 헌법책, 민형사 외면

[뉴스핌=김범준 기자] 아듀(Adieu), 사법시험. 지난 21부터 24일까지 나흘 간 실시된 제59회 2차 사법시험을 마지막으로 사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50년 고등고시 사법과 1회 실시 이후 67년만, 1964년 사법시험으로 변경돼 치러진 사시 1회 이후 53년만이다.

제59회 사법시험 2차시험이 열린 2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백양관에 마련된 시험장으로 고시생들이 들어가고 있다. 김학선 기자 yooksa@

'고시촌'이라고 불리는 서울 관악구 신림2동(서림동)과 9동(대학동) 일대는 요즘 한적하다. 지난 주에 시험이 끝난 사시생들이 하나 둘 빠져나간 데 이어, 이번 주는 '행정고시'로 통용되는 2017년 국가공무원 5급 공개경쟁채용 2차 시험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고시생 없는 고시촌이 됐다.

28일 낮 12시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 입구 전경.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각종 학원·독서실과 식당·편의시설이 마주보고 있는 만큼 평소 이 거리는 수험생들로 붐빈다. 하지만 이 날은 한적하다. 김범준 기자

고시생들은 주로 '고시식당'이라고 불리는 음식점에서 밥을 먹는다. 한끼 5000원이면 뷔페식으로 든든히 먹을 수 있다. 쿠폰을 미리 사놓거나 한달 내내 급식처럼 먹을 수 있는 '월식'을 끊으면 한끼당 3000원.

평소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점심시간이면 이곳 고시식당들은 수험생들로 가득 찬다. 맛있는 메뉴가 나오는 날이면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날은 수험생들의 발길이 뜸하다.

28일 낮 12시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 위치한 한 고시식당 입구 전경. 평소 점심시간이면 수험생들이 긴 줄을 서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고시식당을 운영하는 고모씨는 "지난 주 사시도 끝나고, 이번 주는 행시 기간, 또 최근 9급 공무원과 경찰공무원 시험도 끝나서 수험생들이 많이 빠졌다"면서 "예전과 같이 꽉 차는 날은 요새 거의 없다"고 말했다.

기자가 실제 낮 12시부터 30분까지 식사를 하며 본 결과, 80석 식당에 50~60명이 거쳐갔다. 4명 중 1명은 수험생이 아닌 동네 주민들이었다.

28일 낮 12시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 위치한 한 고시식당 내부 전경. 평소 점심시간이면 수험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매우 붐비지만, 이 날은 군데군데 빈 자리가 많이 보인다.

고시생에겐 식사 시간은 바깥 공기를 쐬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 평소 이 시간 학원과 독서실 등이 모여 있는 거리는 담소를 나누거나 산책을 하는 수험생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요즘 거리는 여유가 있다.

28일 낮 12시30분께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 위치한 한 학원가 전경.

한 고시학원에 들어가봤다. 강의 안내 책자와 수업 시간표에 5급·법행(법원행정직)·7급·변시(변호사시험)·노무사 등은 눈에 띄었지만, '사시'라는 단어는 눈을 비비고 봐도 없다. 사법시험이 폐지됐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시학원이 빠지고 경찰공무원이나 7·9급 공무원 학원들이 들어서기도 했다. 고시촌에서 경찰간부 시험을 준비하는 이모(29)씨는 "예전엔 경찰·공무원 시험하면 노량진이었는데, 시끄럽고 학업분위기도 좋지 않아 조용한 고시촌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사시가 폐지되고 사법고시생들이 고시촌을 떠났음을 실감할 수 있는 건 학원 뿐이 아니었다. 복사·제본집 역시 '사시'라는 단어는 빠진지 오래였다. 대신 '로스쿨', 'LEET'가 들어갔다.

고시촌에서 중고서점을 운영해 온 한 점주는 "지난 주 사시가 끝나고 각종 법전과 수험서를 팔려는 고시생들이 많았다"면서 "그래도 헌법은 5·7급 공무원 시험 과목에 있어 그나마 수요가 있지만, 민·형·상법 등은 워낙 사려는 사람들이 없어 (중고책으로) 잘 안 받는다"고 했다.

고시촌에서 공부하는 수험생들은 대개 사설 독서실을 다닌다. 수년 전까지 각종 독서실과 도서관은 대부분 사시생으로 가득 찼었다. 연간 1000명을 선발했던 만큼 도전하는 고시생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007년, 로스쿨 도입이 확정되고 사법시험 선발인원 단계적 축소 및 폐지 수순을 밟으면서 사시생들은 서서히 떠났다. 올해 마지막 시험은 선발 인원은 단 50명. 빈 자리는 변시와 5·7·9급 등 공무원시험 수험생들로 채워졌다.​

28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 위치한 한 사설 독서실 전경.

고시생들의 빈자리는 부동산 시장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사시 1000명 시절에는 좀 괜찮다 싶은 방은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하지만 요새는 거의 모든 원룸들이 '임대문의'와 '좋은 방 있음' 등의 문구를 내걸고 있으며,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월세가 저렴한 편이다.

28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 위치한 한 원룸건물 입구 모습. '임대문의'라는 문구와 연락처가 잘 보인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걸까. 사법시험은 사실상 올해로 폐지됐지만, 존치 움직임은 여전하다.

제59회 사법시험 2차시험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24일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고시생모임'은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을 위한 진정한 법조인 양성제도의 방향은 사법시험과 로스쿨의 병행"이라며 "국회는 법사위에 계류 중인 사법시험 존치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호소했다.

마지막 사법시험이 치러진 6월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고시생 모임 회원이 사법시험 존치법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대한법조인협회 역시 지난 26일 성명서를 통해 "국민의 75% 이상이 사법시험 존치를 희망한다"면서 "사법시험은 지난 50여 년 간 단 한 건의 비리도 없었던, 자신의 실력으로만 평가받는 가장 공정하고 권위 있는 시험"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나이가 많거나 스펙이 좋지 않으면 입학 자체가 어려운 로스쿨 제도 하에서는 더 이상 제2의 노무현, 제2의 박준영(재심 전문 인권변호사)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역구 국회의원인 오신환 바른정당 의원은 "오히려 기회는 불공정하고, 결과는 편파적이라는 것이 국민들의 생각이다"며 사법시험 존치를 주장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를 패러디하기도 했다.

 

[뉴스핌 Newspim] 김범준 기자 (nunc@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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