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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녹아내리는 건축물을 만들다, 안토니 가우디

기사등록 : 2017-12-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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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32)

건축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실용적인 공간이다. 벽에 걸어두고 보는 그림이 아니며 음반으로 연주되는 음악도 아니다. 가우디는 ‘건축물’을 보는 이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만들어낸 건축가로 기억된다. 모든 건축물의 설계도면으로부터 시작된 가우디의 정신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꿈틀거리는 건축물들은 조각 작품으로 변신되었다. 즉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건축에 사용된 모든 재료들이 통합되어 전혀 새로운 하나의 생명체로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건축사에서 독특하면서 역동성이 넘치는 건축물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가우디는 건축의 성인으로 불리고 있다. 또 그는 실내 디자인과 장식 조각, 심지어 의자와 화장대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작품들을 제작한 20세기의 독창적인 예술가로 불리고 있다. 그의 거대한 영혼과 작품은 당대보다도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어떤 작가는 그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가우디는 바그너와 세잔 및 그 외의 예술가들과는 달리, 바르셀로나에서 혼자 혁명을 시작했다. 그 결과, 지도 위에서 카탈루냐의 위치를 표시하듯 미술사에서도 카탈루냐 지방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국가와 다른 분야의 천재들이 했던 모든 것, 앞서간 예술가들이 했던 모든 노력을 단 혼자의 재능으로 일궈낸 가우디를 발견하게 된다.”

가우디는 흥미로운 장식물이나 조각품으로 건물을 장식하는 걸 좋아했다. 또 직선이나 사각형보다 곡선과 아치, 포물선을 많이 활용하여 건물을 지었다. 이처럼 그의 전 작품에 드러나는 우아하고 기이한 곡선과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는 마치 20세기의 신비로운 추상화 작품들을 보는 듯하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이슬람의 건축 양식과 아르누보(Art Nouveau), 그리고 프랑스의 고딕 복고양식 건축가인 비올레 르 뒤크의 이론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뒤크의 《프랑스 건축 사전》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책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또 그는 건축 색감을 중요시했는데, “건축은 색깔을 거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형태와 부피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 색깔은 형태를 보완해주는 동시에 가장 분명하게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그의 위대한 작품들은 보기만 해도 호기심을 자아내며 들어가고 싶고 거닐고 싶으며, 또 만지고 싶어진다. 그의 건물 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현재까지 모두 일곱 작품이다. 대표작인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 공원》, 《구엘 저택》 《사그라다 파밀리아》 등은 건축과 미술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안토니 가우디(Antoni Placid Gaudí, 1852~1926)는 1852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남서쪽에 위치한 레우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주물제조업자로 가우디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가우디 자신도 말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도 설계도면에서 시작하여 부피를 창조해내는 조각가들이었다. 나 역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할 때면 먼저 공간부터 본다. 이처럼 내가 공간을 느끼고 보는 재능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와 조부와 증조부가 모두 주물제조업자였기 때문이다. 주물제조업자란 다름 아닌 표면으로 부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몇 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건축가인 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가우디는 자신의 재능을 타고난 유전자 덕분이라고 밝힌다. 가우디는 비록 가난한 집안에 병약한 소년으로 자랐으나 건축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가우디가 ‘가우디 건축의 성지’라고 불리는 바르셀로나로 간 것은 17세 때로 건축 공부를 위해서였다.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거쳐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했다. 학창시절,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었고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매우 특이한 학생이었다.
가우디의 학교생활을 짐작케 하는 일화가 있다. 가우디가 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장을 주던 학장은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그러던 그 학장이 훗날 가우디가 성가족성당을 건축하는 총감독이 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된다.

가우디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 생계를 위해 철 세공업과 같은 일을 시작했다. 물론 이 경험이 가우디 건축에 다 녹아들어갔다. 대장장이가 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망치를 들고 쇠를 두들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평범한 건축노동자처럼 지내던 가우디에게 구엘(Guell)이라는 이상적인 후원자가 나타나면서 마침내 예술가로서의 인생이 펼쳐지게 된다. 사업가이면서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구엘은 자신의 재산을 가우디가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투자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구엘 별장, 구엘 저택, 구엘 공원들은 가우디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탁월한 작품들이었다.
구엘은 1878년 프랑스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가우디의 작품에 흥미를 느꼈다. 다만, 처음에는 그도 가우디의 재능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담장과 분수, 건물 입구 등 비교적 덜 중요한 곳의 건축을 맡겼다. 그러나 가우디의 뛰어난 능력을 눈으로 확인한 뒤인 1886년부터는 자신이 살 저택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른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고객과 건축가로 만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술을 사랑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 갔다.
구엘 저택은 가우디의 첫 번째 대규모 작업이었는데, 그 독창성이 인정되어 1984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건물 입구에서부터 지붕 위에 세워진 굴뚝에 이르기까지 유연한 곡선을 활용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곳은 3개의 층을 뚫어 만든 중앙 거실이다. 중앙 거실에 천장에서부터 빛이 내려와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광경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으로 몰아넣고 있다. 다만, 이 건물은 보통사람들이 살기에는 너무나 기괴한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구엘의 부인은 여기서 3개월을 채 살지 못하고 뛰쳐나왔다고 전해진다.

가우디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많은 건축 학자들은 《카사 밀라(Casa Milà)》를 선택한다. ‘카사 밀라’에 가우디의 예술적인 독창성이 모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카사 밀라’는 요즘의 빌라와 비슷한 공동주택 건물로, 1906년 공사를 시작하여 4년 후인 1910년에 완성되었다.
《카사 밀라》는 지금 보아도 주변 건물과 확연히 구분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옆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일렁이는 파도 같고, 정면에서 바라보면 암벽을 깎아 놓은 듯 보인다. 그러나 《카사 밀라》가 처음 지어졌을 때는 너무 획기적인 모습 때문에 조롱거리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가우디의 창의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평가들조차 의견이 달랐으나, 그때까지 지어진 건축물들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만은 모두 인정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현대 건축의 출발점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건축 방식이나 재료에 얽매이지 않은 전혀 새로운 창의력에 의한 건축양식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가우디는 건축을 하면서 나름의 원칙을 하나 정해 놓았다. 가능하면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건축물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구엘 공원》은 가우디가 건축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이러한 철학이 올곧이 드러나 있는 공간이다. 가우디는 건축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자 한편으로는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카사 밀라》와 《구엘 저택》 등에서도 이런 생각을 엿볼 수 있지만 가장 상징적으로 잘 드러난 곳은 《구엘 공원》일 것이다.
구엘 공원의 모든 건축물과 시설에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돌과 흙에 유약을 칠하여 만든 다양한 타일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또한 그의 건축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구엘 공원은 소나무, 떡갈나무, 종려나무, 백리향 등의 나무와 재스민, 등나무 같은 덩굴식물, 건축자재로 사용된 타라고나 지방의 마른 돌멩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각각의 고유한 색과 불규칙한 배열이 자연의 풍경에 녹아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1883~) <사진=이철환>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스스로 개성이 넘치는 도시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시민들이 이런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우디가 남긴 건축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은 아무래도 성가족 대성당 즉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ília)》일 것이다. 이 성당은1883년 11월 3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1926년까지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공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가우디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을 위해 사용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말년에 가우디는 건축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을 멀리하고 수도자처럼 살았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간이며, 손상된 인간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종교적인 신념과 건축가로서의 열정이 결합하여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역작이자 종교적인 믿음의 발현 행위이기도 한 이 성당을 짓기 위해 다른 일들은 모두 포기했다.
가우디가 이 건물의 감독직을 수락한 것은 1883년 가을이었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을 이 작업 만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건축은 계속되고 있다. 또 건설 자금은 그의 뜻을 받들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성당'이 되도록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기부를 통해서만 충당되고 있다.

그러면 성가족 성당의 설계모형을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를 뜻하는 파사드가 크게 3개로 나누어져 있다. 동쪽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벽화로 장식한 '예수 탄생' 파사드를, 서쪽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를 묘사한 '수난' 파사드를, 그리고 정문에서는 어떻게 인간이 신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광' 파사드를 볼 수 있다. 이 파사드의 중앙 문은 사랑, 오른쪽은 믿음, 왼쪽은 소망의 문이다. '사랑, 믿음, 소망'이라는 기독교의 3대 교리를 건축물로 표현해 냈던 것이다. 그리고 머리 위로는 커다란 물렛가락 모양의 종탑이 몇 개나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1926년 가우디가 사망하였을 당시에는 '예수 탄생' 파사드와 종탑 한 개, 성가대석 공간, 그리고 지하 납골당만이 완성된 상태였다. 가우디 자신도 이 성당의 건축에는 200년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비전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1926년 6월 7일,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가우디는 전차에 치어 3일 후인 10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고 당시 너무 초라한 그의 행색 탓에 아무도 이 거장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래서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겨져 별다른 치료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 내다본 천재 건축가이자 신앙심과 인간에 대한 사려까지 깊었던 가우디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지하에 묻히게 되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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