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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맨발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

기사등록 : 2017-12-2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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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40)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휘트먼의 시처럼, 이사도라 던컨은 꽉 끼는 슈즈를 벗어버린 맨발과 코르셋을 벗어버린 맨 몸으로, 내면을 표현하려는 자유로운 움직임을 무용으로써 승화시킨다. 이 몸짓이 훗날 현대무용의 시초가 된다.
이사도라는 미국의 무용수로, ‘자유무용’을 창시하여 현대무용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한다. 그녀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 그들의 숭배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편협한 사람들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착상과 행동이 시대를 너무 앞선 것이었고 사회의 인습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사도라는 춤의 위대한 개혁자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녀는 인위적· 기교적인 제한을 거부하고 자연스런 움직임의 우아함을 중시함으로써 그때까지 엄격한 형식과 현란하지만 공허한 기술적 묘기의 나열에 의존하던 춤을 해방시켰다. 그리하여 나중에 현대무용이 수용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이사도라 예술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자연스럽다는 것, 둘째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부활시켰다는 것, 셋째 음악을 무용에 종속시켰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녀의 무용에서의 자연주의란 인공적인 기교 제일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이며, 자유정신의 찬가(讚歌)였다. 그 결과는 그녀의 로맨틱한 정신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건강미에 대한 강렬한 흠모로 나타났다. 음악 또한 악보와는 상관없이 그 음악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감정적으로 무용에 반영시켰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기존의 표현 기교를 답습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지 기교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표현 그 자체에도 창의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무용예술을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대중들에게로 개방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이후에 일어난 신무용 운동에 영향을 준 ‘현대 무용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다.
이사도라 역시 젊었던 시절에는 고전발레를 배웠다. 어릴 적부터 자연을 사랑하는 반항아였던 그녀는 이윽고 세련되기는 했으나 제약이 많고 인공적인 기법 위주의 고전발레에 의문을 품고, 좀 더 자연친화적이며 자유로운 춤에 대한 동경이 강렬해졌다. 고전발레를 인간의 몸을 기묘하게 뒤틀리게 하는 것이라며 철저하게 배격했고 자신 또한 곡예사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1878~1927)은 187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산한 은행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던컨은 은행가이면서 예술과 풍류를 즐기는 멋쟁이이자 바람둥이였다. 이사도라는 이런 아버지를 성가신 짐인 동시에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겼다. 파산과 이혼으로 인한 궁핍 때문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손수 짠 편물을 이 집 저 집 다니며 팔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의 어머니는 밤마다 자녀들에게 글을 읽어주었다. 그때 이사도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였는데, 이후 그녀는 자신을 휘트먼의 정신적인 딸이라고도 즐겨 말했다.
“나는 나를 찬양하고 나를 노래하리라. 그리고 내가 취한 것에 그대도 취하리라...”

이사도라 가족은 생계를 위해 돈벌이에 매달리면서도 언제나 시와 음악을 가까이 했다. 그녀는 훗날 자신의 진정한 교육은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에 이뤄졌고 학교 교육은 쓰레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그녀는 열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남는 시간에 인적이 없는 숲 속이나 해변으로 뛰어가 나체로 춤을 추었다. 그럴 때면 바다와 나무가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있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들은 바다와 바람, 어머니가 피아노로 들려주던 음악, 꽃의 개화와 벌들의 비행,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풍광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사도라는 20세가 되던 해 일자리를 찾아 동부로 향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시카고의 무대에 올랐을 때 발레슈즈인 토우를 던지고 타이즈도 입지 않은 채, 맨발과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발레를 했다. 그러자 그동안 기교 위주의 고전발레에 익숙해 있던 관객들은 비난과 조소를 보냈다. 얼마 후 열린 뉴욕에서의 공연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조국에 실망하여 21세가 되는 1900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당시 미국을 떠나면서 돈이 모자라 가축 수송선을 타고 갔다. 유럽에서의 첫 행선지는 영국이었다.
유럽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사도라는 열렬한 박물관 애호가가 되었다. 런던과 파리에서 박물관에 드나들며 특히 그리스 문화에 매료되어 심취하기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 조각상들을 연구하면서 그녀는 자기가 그때까지 본능적으로 추어왔던 춤사위와 자세들이 고전적인 것임을 확인하였다.
이 그리스 석상들을 보며 영감을 얻은 그녀는 훗날에도 그리스 의상과 같은 줄 몇 개로 고정한 넝마 같은 옷을 입고 맨발로 춤을 추었다. 또 그녀는 박물관에 있는 그림 속의 춤추는 동작을 따라 했다. 당시 사람들은 종종 춤을 추면서 길을 가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이때 그녀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달나라에서 왔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맨발의 이사도라 공연장면 <사진=이철환>

마침내 이사도라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런던에서 달밤에 춤을 추는 모습이 당시 정상급 여배우 패트릭 캠벨의 눈에 들어 런던 사교계에 입문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런던 지도층 부인들이 벌인 여러 모임에 초청받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운 춤사위로 춤을 추어 호평을 받는다. 당시 쇠퇴기에 들어선 기존의 발레에만 익숙해 있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극장과 발표회장은 숲의 요정처럼 옷이라곤 별로 걸치지 않은 채 맨발로 춤추는 이 젊은 여성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덜 입고 나온 듯한 옷차림과 맨발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예술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이사도라는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고, 각지에서 그녀가 주장하는 ‘자유댄스’를 발표하여 갈채를 받는다. 특히 독일에서는 가장 강력한 지지를 획득했다. 독일은 ‘발레가 없는 나라’로 불려 육체문화 운동이 활발했는데, 이사도라는 그 운동에 큰 영향을 주고 독일 신무용의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1904년 베를린에 무용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후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에도 학교를 만들었다. 이처럼 그녀가 유럽 생활을 하는 동안 현대무용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만드는 등 무용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사도라의 사생활 또한 세간의 금기들을 줄곧 거부한 탓에 그녀의 예술만큼이나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결혼을 혐오하던 무대장치가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서 딸 데어도르를 낳았고,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와의 사이에서 아들 패트릭을 낳았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그녀 인생의 가장 큰 비극으로 자리 잡는다.
비 내리는 4월의 어느 봄날, 이사도라는 두 아이와 보모를 데리고 파리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춤 연습 때문에 지루해할 아이들을 집으로 먼저 돌려보냈는데, 그때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탄 자동차는 센 강을 따라가다 강으로 추락해 모두 익사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녀는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헤어나지 못했다. 그 이후 파리 시민들은 미친 듯이 아이들 이름을 울부짖으며 센 강변을 뛰어다니는 이사도라를 몇 번이나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슬픔을 잊기 위해 무용학교를 새로 설립하는 일에 몰두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이어 남미· 독일· 프랑스에서 순회공연을 가졌으나 성과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1920년 모스크바로부터 초빙을 받게 된다. 당시 모스크바는 이사도라와 같은 혁명적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비쳐졌고, 또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기도 했던 이사도라는 이를 수락했다.

이사도라는 모스크바에서 17세 연하의 시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을 만난다. 그런데 그와의 만남은 이사도라에게는 또 다른 비극의 시발점이었다. 예세닌이 대단한 천재일 뿐만 아니라 대단한 미치광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그녀는 엄청난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이사도라의 눈에는 예세닌이 마치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금발의 아들 패트릭처럼 보였다. 그는 작은 키에 가냘픈 체구, 눈부신 금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와도 같은 한없는 이해와 염려 그리고 헌신이었다. 이사도라는 오랜 망설임 끝에 1922년 그와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
그러나 이사도라는 예세닌과 살면서 한순간도 평화로울 때가 없었다. 예세닌은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간질증상을 보였고, 술에 취하면 폭언을 퍼붓고 구타까지 일삼았다. 또 명품에 광적으로 탐닉하는 낭비벽까지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함께 살던 그녀 역시 점차 망가지고 있었다. 비참한 현실을 잊으려는 듯 항상 술에 취해 있었기에 춤 연습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사도라는 그와 헤어지지 못한 채 매달렸다.
이 무렵 이사도라는 예세닌과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떠났다.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러시아인 남편을 둔 이사도라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는 몸이 많이 불어 있었고 춤 기량도 이미 내리막길에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공연 도중 나체에 가깝게 흘러내린 의상 때문에 그녀는 ‘공산주의자’, ‘매춘부’, ‘천박한 댄서’ 등으로 미국 언론에 묘사되었다.
그때 이사도라는 이렇게 반박했다. “왜 내 몸의 일부가 노출되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요? 그것이 무엇인가를 상징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며 청교도주의의 속박과 편협한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신체를 숨기는 것이 외설적인 것입니다. 내 몸은 내 예술의 성전입니다.”

안녕, 친구여, 안녕.
사랑하는 친구여, 그대는 내 마음속에 있네.
예정된 이별은 미래의 만남을 약속한다네.
안녕, 친구여, 안녕, 악수도 작별 인사도 나누지 말자.
슬퍼하지 마라. 슬픔에 꺾이지 마라.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산다는 것 역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지.

1925년 예세닌은 《잘 있거라, 벗이여》란 시를 남기고 서른 살의 나이에 손목을 그어 자살한다. 이후 이사도라는 니스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망가지고 있었다. 초라하고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말년의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타고 가던 차의 뒷바퀴에 스카프가 말려들어가 질식사하게 된다. 그날 그녀는 생전 예세닌이 탐닉하던 붉은색 긴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뚜껑이 열린 오픈형 스포츠카에 올랐다. 새로 알게 된 남자와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차는 출발했고, 그녀의 목을 감싼 긴 스카프는 차 뒷바퀴에 감겼다. 가녀린 목은 순식간에 꺾였고, 그렇게 그녀의 생은 끝났다.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타오르는 양초 사이에 누운 시신 옆에는 두 아이를 안고 있는 이사도라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생전에 자주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내 영혼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때까지 지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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