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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장밋빛 인생'을 노래한 뮤즈, 에디트 피아프

기사등록 : 2017-12-2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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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44)

상처 입은 영혼으로 태어나 몸조차 하늘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러나 목소리 하나만은 허락받아 그 소리로 세계대전 이후 어둠과 실의에 잠겨있던 프랑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의 가슴 깊이 묻혀 있던 슬픔과 상처를 검은 상복을 입고 대신 노래하고 울어주었던 여인이었고, 평탄치 않았던 생애의 힘겨움을 노래로 풀었던 사람이며, 진정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방황하던 여자였고, 자기를 기다리는 팬들을 위해 무대에서 쓰러진 요정이었다. 에디트 피아프, 그녀의 일생은 한마디로 불꽃같은 삶이라 할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겨울 파리의 빈민가에서 떠돌이 곡예사인 아버지와 거리의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후 2개월 만에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은 그녀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들의 손에서 자랐다. 가난했기에 그녀는 늘 병마와 기아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탓에 성인이 되고도 키가 겨우 142cm에 불과했고 몸무게는 40㎏을 넘지 못했다.

그렇게 자란 피아프는 열세 살이 되던 해부터 길거리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거리의 노래꾼이 되어야 했다. 길가를 떠돌다 16세에 한 남자를 만났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기가 병에 걸렸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보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보내야만 했다. 슬픈 운명의 대물림 같은 삶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늘 외로웠고 또 세상이 두려웠다. 그리고 사랑에 목말라 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끼고 사랑을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한시도 견딜 수 없는 불안에 휩싸여 살았다.

부랑의 세월을 보내던 1935년 어느 날, 피아프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클럽 제르니의 사장 루이 르플레의 귀에 들려와 꽂혔다.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내는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르플레는 자신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면서 원래 이름인 ‘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Edith Giovanna Gassion)’ 대신 ‘라몽 피아프(La Môme Piaf)’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어린 참새’ 또는 ‘작은 참새’라는 뜻이었다.

글을 배우게 된 피아프는 자신의 슬픈 성장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었다. 그녀의 애잔하게 떨리는 목소리에는 비장함과 애수의 감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또 무대 드레스로는 검은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무대에서 항상 검은 의상만을 고집했다. 검은 옷은 마치 자신의 피부와 같다고 말했다. 이후 이 검은 드레스는 내내 그녀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프랑스의 목소리가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속에서도 피아프의 노래는 끊이지 않았다.

이후 피아프의 명성은 멀리 미국에까지 퍼져나갔다. 1947년부터는 미국 순회공연이 시작되었다. 처음 그녀가 미국무대에 섰을 때 관중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프랑스 최고의 연예인이라는 여성이 너무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자 객석은 이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조그마한 체구에서 터져 나오는 절창에 모두가 넋을 잃었다. 좋은 반응을 기반으로 피아프는 미국 최고의 무대인 카네기 홀에서만도 두 차례의 공연을 가졌다.

피아프가 한때 무대에 섰던 파리의 물랭루즈 <사진=이철환>

피아프의 이름이 널리 퍼지면서 한명의 남자가 운명처럼 찾아온다.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영화감독인 천재 예술가 장 콕토를 만나게 된다. 1940년 장 콕토는 피아프를 위해 극본을 썼고, 이의 성공으로 그녀는 배우로서도 인정을 받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26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생 좋은 친구로 지내게 된다. 어린 시절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탓인지 피아프는 남자 없이 지낼 수가 없는 여자였다. 그리고 이제는 꽤나 성공을 거둔 그녀에게 남자들이 관심을 보이며 접근해 왔다.

그녀에게 있어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첫 번째 남자는 이브몽탕(Yves Montand)이었다. 1944년 여름, 피아프는 카바레 물랑루즈의 무대에서 한 무명의 가수를 만나게 된다. 바로 이탈리아에서 온 부두노동자 출신 이브몽탕이었다. 29세의 파이프는 이 잘생긴 23세의 청년을 곧 자기 남자로 만들었다. 피아프의 후광 덕분에 이브몽탕은 1년 만에 가수 겸 배우로 크게 성장해 대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둘은 사랑싸움을 거듭하게 되고 결국 상처를 남긴 채 헤어지게 된다. 오늘날까지 애창되고 있는 피아프의 《장밋빛 인생(라비앙 로즈, La vie en rose)》은 자신이 떠나보낸 연인 이브몽탕을 위한 노래였다.

내 시선을 내리깔게 만드는 눈동자
입가에 흩어지는 미소
이것이 나를 사로잡은
그의 수정하지 않은 초상화예요
그가 나를 두 팔에 안아줄 때
그는 아주 나지막이 속삭여요
그러면 나는 장미 빛 인생을 보게 되요
그는 나에게 매일 사랑의 말들을 속삭여 줘요
그런 것들이 나를 위대한 무언가로 만들어 줘요
한 아름의 행복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요
나는 그 행복의 이유를 알죠
이 인생에 있어서 그는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나는 그를 위해 존재 한다는 사실을
그는 나에게 말해 주었고

그 사실을 목숨 걸고 맹세 했어요
그를 언뜻 보기만 해도
고동치는 내 심장을 느껴요

끝나지 않은 사랑을 나눈 밤들
커다란 행복이 그 자리를 차지해요
그러면 권태로움과 슬픔이 사라져요
그 사랑 때문에 죽을 만큼 행복해요

피아프에게는 수많은 남자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피아프가 가장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유부남 복서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 )이었다. 세르당은 세계 미들급 챔피언에 오른 프랑스의 권투영웅이었다. 이 둘의 사랑은 불륜이었지만 워낙 진지하고 뜨거웠기에 아름다운 영혼의 결합이라고 불리었다. 둘은 끊임없이 사랑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너를 알고 난 뒤로 나는 많은 것이 변했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천박하고 저속한 생각들을
네가 모두 가져가 버렸거든.
나는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갈 거야. 나는 너를 존경해.
나는 결코 너에게 어울릴 만큼 충분히 아름다울 수는 없을 거야.
너의 영혼은 너무도 아름다우니까.
-에디트 피아프-

한낱 난폭하고 가엾은 권투선수일 뿐인 내가 당신 같은
여자로부터 사랑을 받다니, 나는 정말 운이 좋은 남자야.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당신과 저녁마다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함께 잠들 사람은 바로 나야.
밤마다 잠들기 전에 책을 읽어주고, 내 눈과 내 손에 키스를 해줄 사람,
진정으로 에디트 피아프를 가진 사람은 나야.
다른 사람들도 당신의 미소를 가질 수 있겠지만,
당신의 최고의 모습을 가진 사람은 바로 나야.
그래서 나는 어떤 경우에도 불평하지 않을 거야.
당신을 경배하고 사랑해.
-마르셀 세르당 -

그러나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 짧았고 비극적이었다. 미국에서 공연 중이던 피아프는 파리에 홀로 남아 있던 세르당이 너무나 보고 싶었기에 한시바삐 자신을 만나러 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세르당은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배편을 이용하기로 한 당초 계획을 변경해 비행기를 타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를 태운 비행기가 추락함에 따라 세르당은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피아프는 자신 때문에 세르당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피아프는 삭발을 한 채 무대에 올라 《사랑의 찬가 (Hymne a L'amour)》를 불렀다. 히트곡 《사랑의 찬가》는 이렇게 마르셀 세르당을 기리며 만들어진 노래였다.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진다 해도
모든 대지가 허물어진다 해도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사랑이 매일 아침 내 마음에 넘쳐흐르고
내 몸이 당신의 손아래서 떨고 있는 한
세상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당신의 사랑이 있는 한
내게는 대단한 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만약 당신이 나를 원하신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가겠어요

금발로 머리를 물들이기라도 하겠어요
만약 당신이 그렇게 원하신다면
하늘의 달을 따러, 보물을 훔치러 가겠어요

만약 당신이 원하신다면
조국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겠어요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준다면
사람들이 아무리 비웃는다 해도
나는 무엇이건 해 내겠어요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당신의 인생이 갈라진다고 해도
만약 당신이 죽어서 먼 곳에 가 버린다 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겐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나 또한 당신과 함께 죽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푸르름 속에서
두 사람을 위한 영원함을 가지는 거에요
이제 아무 문제도 없는 하늘 속에서...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피아프의 마지막 남자는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준 21세 연하인 테오 사라포였다. 그와는 결혼까지 했다. 만년에 피아프는 돈과 명성은 얻었지만 점차 알코올과 마약에 찌들어갔다. 잇따른 연인들과의 이별, 건강악화, 불면증 등으로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럼에도 계속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육체는 점점 늙고 초췌해져 갔다. 그런 가운데 이루어진 이 결혼은 육체적 결합이 아니었다. 존경하는 스승이자 파리 최고의 디바(Diva)와 암 투병으로 죽어가는 스승을 지켜주는 충직한 제자와의 만남이었다.

마침내 피아프는 1963년의 어느 쓸쓸한 가을날 세상을 떠났다. 4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그녀의 장례식 때 파리의 대주교는 그녀의 삶이 너무나 비기독교적이라는 이유로 장례집전을 거부했다. 그녀는 10명이 넘는 남자와 동거생활을 했고, 이 가운데 두 번은 정식 결혼을 하고 이혼을 했으니 주교로서는 거부할 만도 했다.

그러나 일반 프랑스 사람들 중에는 피아프 그녀를 탕녀라고 비난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장례식은 역사상 최고의 샹송 가수를 추모하는 열기로 뜨거웠고 또한 경건했다. 생전에 그녀가 자주 방문했고 친했던 외인부대 병사들도 그날만큼은 군복이 아닌 검은 옷을 입고 묘지에 달려왔다.
생전에 그녀가 즐겨 부르던 샹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마지막 가는 그녀에게 존경과 애정을 바치기 위해 장례에 참석한 조문객은 무려 10만 명에 이르렀다. 위대한 프랑스의 시인이면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장 콕토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위대했다. 피아프와 같은 여성은 앞으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2007년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담은 영화 《라비앙 로즈 (La vie en rose)》가 만들어져 상영되었다. 그 속에는 이런 명대사들이 담겨있다.
“죽음이 두려우세요?-죽음은 두렵지 않아요. 단지 외로움이 두려울 뿐이야!”
“여성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무슨 말을 하시겠어요?- 사랑”
“젊은 여성에게는요?-사랑”
“어린이에게는요?-사랑”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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