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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예술의 상업화를 가속시킨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

기사등록 : 2018-01-0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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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47)

“대통령도 나와 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앤디 워홀의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현대 소비사회에서 대량 생산된 상품이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워홀의 코카콜라 그림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모두 마시는 '코카콜라'가 그 자체로 소비사회의 획일화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또 누구나 같은 돈을 내고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다는 현대사회의 평등개념을 이야기하고자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앤디 워홀은 현대미술의 아이콘이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었던 그는 동 시대 문화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이를 시각화해내는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대량생산이 특징인 현대문명을 받아들여 기계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미술을 만들어냈다. 그림의 재료와 방식은 잉크에 의한 ‘실크스크린(silk screen)’ 기법이다. 실크스크린이란 판화기법의 일종으로 제작과정이 비교적 간편하고 일단 판이 완성되면 단시간 내에 수십 장을 찍어낼 수 있어 상업적인 포스터 등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본래 워홀은 예술이란 대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대량 생산해서 싸게 팔았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는 그의 작품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예술품이 되었다. 1963년에 제작된 《여덟 명의 엘비스(Eight Elvises)》라는 제목의 작품은 1억 달러에 거래되어 그의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하였다.
기타 주요 작품으로는 《캠벨 수프(Campbell's soup)》, 《금빛 마릴린 먼로(Gold Marilyn Monroe)》, 《재키(Jackie)》, 《마오(Mao)》, 《자화상(Self-Portrait)》 등의 실크스크린과 영화 《잠(Sleep)》, 《엠파이어(Empire)》, 《첼시의 소녀들(The Chelsea Girls)》 등이 있다.

워홀의 작품활동은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끝없는 부정과 도전이었다. 클래식미술과 대중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더 나아가 미술품을 상업시스템에 종속되는 상품으로 간주했다. 미술가의 위상을 대중적인 스타의 그것과 큰 차이 없이 규정하기도 했다.

워홀의 작품은 대중미술인 팝 아트(Pop Art)의 부류에 속한다. 팝 아트는 상업주의와 소비주의에 깊이 물든 사회의 문화적 산물이다. 워홀은 대량생산이 특징인 이 문화를 받아들여, 기계를 이용해 작업하는 실크스크린으로 작품을 생산했다. 그는 작업실의 조수들도 작품 제작에 참여시킴으로써, 의식적으로 완성작에서 미술가의 손길을 지워버렸다. 이처럼 원작자의 의도를 배제하는 방식 외에도 그의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대담하고 선명한 색채이다.

워홀은 창조와 창의의 개념을 편집과 재구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작품의 아이디어가 자신의 독창성에서 비롯되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아이디어나 작품을 빈번히 차용했으며, 같은 주제를 무수히 반복하는 작품활동을 했다. 이들은 언뜻 보면 복제품 같은 작품들이지만 나중에는 기존의 것과는 차별화된 어떤 새로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비슷한 프린트들을 반복하는 워홀의 수법이 기술발전으로 이미지가 대량 복제되면서 정작 개별 사건이나 인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 현대사회를 풍자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워홀은 언제나 대중적인 화제를 작품의 오브제로 선택했다. 마릴린 먼로가 갑자기 죽자, 이를 소재로 작품을 대량생산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962년 8월 5일 마릴린 먼로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서 그녀를 소재로 해 50여 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특히《금빛 마릴린 먼로》는 먼로를 대상으로 한 초상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다.

‘Marilyn Monroe’, 실크스크린으로 다량 찍어낸 먼로의 이미지 <사진=이철환>

이 작품에서 먼로의 얼굴은 황금빛 공간에 둘러싸여 그 이미지가 끊임없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과장된 색은 비현실적이며, 웃고 있는 얼굴 또한 미디어에 비춰지는 하나의 정형화된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먼로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 영원한 아름다움과 젊음의 상징으로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물론 그림 속 그녀의 환한 미소가 한없이 덧없게 느껴지는 것은 그 어디에도 진실은 없고 단지 허상만을 좇는 우리 삶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워홀은 또 실험적인 전위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 중에는 《13명의 수배자들(thirteen most wanted men)》같이 당대의 흉악범죄자들을 벽화로 만들거나, 비행기 추락 등 언론에 보도된 대형사건 사진을 ‘마릴린 먼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러 번 반복해서 프린트한 것이 다수 있다. 1970년대 말에 제작된 《산화 그림 (Oxidation Painting)》은 원래 ‘오줌 그림’으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물감에 금속가루를 섞어 칠한 캔버스에 오줌을 갈김으로써 제작된 전위예술 작품이다.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은 1928년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의 허름한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슬로바키아 북동부의 산악지대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온 이민자이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허약해서 걸핏하면 아팠다. 여덟 살 때는 류마티스성 열에 의해 생기는 병 때문에 거의 1년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다. 이 시기에 그는 어머니와 아주 가까워졌다.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애지중지했으며, 만화책, 색칠하기 책, 영화잡지 등을 사주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워홀은 카네기 멜론 대학에 진학해 광고예술을 배운 후 1949년에 졸업했다. 1952년에는 신문광고 미술 부문의 아트 디렉터즈 클럽상을 수상했다. 이후 상업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전업 예술가로 전직했다. 1960년 그는 미술의 세계로 발을 옮겨서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의 만화들을 모티브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을 접한 뒤에 여기서 손을 뗀다. 1961년 33세의 워홀은 캔이나 달러 지폐를 모티브로 해 팝아트를 탄생시켰다.

워홀은 1964년부터 뉴욕에 《팩토리(The Factory)》라는 스튜디오를 짓는다.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공장(factory)'이라고 불렀다. 팩토리는 알루미늄 포일과 은빛의 그림물감으로 덮인 공간이며, 마치 공장에서 대량생산 하는 것처럼 작품제작을 이미징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여기서 예술 노동자를 고용해,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 프린트, 구두, 영화 등의 작품을 제작한다.

작업실이자 사회적 안식처였던 워홀의 '팩토리'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여기서 할리우드의 전위적인 엘리트들부터 대중아티스트와 별난 보헤미안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룹사운드 롤링 스톤즈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멤버들, 작가 트루먼 커포티, 모델 에디 세즈윅 등도 모임의 주요 인사들이었다. 나중에는 사교장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각종 난잡한 행동과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이상야릇한 변태적인 삶 속에서 그는 예술적 영감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워홀이 40세가 되던 1968년 6월 3일, 발레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으로부터 권총 피격을 받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여성은 급진적 페미니스트 작가였는데, 워홀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그에게 총을 쏘았던 것이다.

솔라니스는 팩토리에서 나오는 워홀을 기다려,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의 총탄이 워홀의 복부와 목을 관통했고, 응급 수술 뒤 그는 두 달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워홀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워홀은 할리우드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사무실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컬러사진과 함께 언론보도 사진에서 스크랩한 방대한 컬렉션에서 뽑아낸 슈퍼스타들의 이미지를 네 가지 색으로 확대, 병렬하는 방식으로 장식되었다. 그 중에서도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레타 가르보, 브리지트 바르도의 이미지가 특히 많았다. 그의 컬렉션에는 골동품상점에서 구입한 할리우드 전기물 여럿과 커다란 스크랩북 세 개, 그리고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영화 속 스타들의 사진이 있었다.

1963년부터 1968년의 기간에는 60편 이상의 영화도 제작하였다. 그러나 실험영화 같은 작품이어서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 공개된 작품은 1966년 《첼시 걸즈(The Chelsea Girls)》이며, 가장 유명한 것은 잠자는 남자를 8시간 동안 계속 비춰주는 《잠(Sleep)》이라는 작품이다. 이후에도 영화 제작을 계속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악마의 죽음》과 《처녀의 생피》 등 공포 영화도 감독했다.

워홀은 실생활에서 평생 명성과 부를 좇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했으며, 작품을 주식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인생 후반부에는 미술가이기보다는 사업가로 자신을 규정하기도 했다.
“사업미술(Business art)은 미술의 다음 단계이다. 또 나는 상업 미술가로 출발했으며 사업 예술가로 마치기를 기대한다.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을 잘 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Making money is art. And working is art. And good business is the best art.)”

작품활동에서의 기행에 비해 그의 사생활은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인 성격인 그는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리고 대단한 효자여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바로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와 함께 살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가 혼자 교회 다니시기가 불편할까 봐 교회에도 같이 다니곤 했다.

기행과 파격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던 워홀은 1987년 2월 21일, 뉴욕의 코넬 의료센터에서 담낭 수술을 받던 중 58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미래에는 누구든 15분간의 유명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In the future everyone will be world-famous for 15 minutes )”

“나는 자연을 소유하거나 파멸시키지 않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탄소가 다이아몬드로 변하는 것처럼 자연 그대로가 사물을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만이 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모든 것들이 미술이며 삶은 곧 미술이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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