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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색 바랜 ‘염리동 소금길'... 재개발 시작되니 '나 몰라라'

기사등록 : 2018-10-1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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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율 높던 '염리동 주택가', 2012년 '범죄예방디자인' 입힌 모범사례
6년 지난 지금은 '방치 상태'... 소금길 30%만 남아
일부 구역 재개발 시작에 주민공동체마저 '예산문제'로 무너져

[서울=뉴스핌] 김준희 기자 = 안내도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현위치 인근에 표시된 '옥잠화길'로 들어서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옥잠화길을 표현한 ‘하늘색’ 색지는 떨어져 나간 지 오래다. 길이가 143m라니 설명을 보고 직선거리를 고려해 위치를 유추해야 했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 소금길엔 옥잠화길을 포함해 능소화길·라일락길·쑥부쟁이길·해당화길·해바라기길 등 6개의 코스가 있다. 각 코스를 대표하는 색도 있었다. 지금은 색깔 구별이 무색한 낡은 안내도만 남았다.

발 닿는 곳곳의 색도 바랬다. 길목을 안내하던 노란 안내선은 큰길가에 들어설수록 희미해졌다. 계단 벽을 둘렀던 형형색색의 페인트도 본연의 색을 잃어갔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 소금길 안내도. 2018.10.12 zunii@newspim.com [사진=김준희 기자]

◆‘범죄예방디자인’ 취지 무색... 6년 새 주민들은 “살기 무섭다”

염리동은 이대역 뒤쪽으로 펼쳐진 달동네였다. 좁은 도로와 경사진 언덕, 낡은 다세대주택이 즐비하던 곳이다.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있었지만 개발이 지연되며 절도 등 생활 범죄가 끊이질 않았다. 여대 근처라는 위치적 특성상 성범죄도 들끓었다.

서울시는 2012년 염리동 일대에 범죄예방디자인(CPTED·셉테드)을 적용해 ‘소금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선시대 소금장수가 소금을 운반하던 길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살아났다. 비상벨로 이웃의 위험을 돕는 지킴이의 집 대문엔 노란색을 칠하고 골목길 바닥 곳곳엔 그림도 그렸다.

우중충한 골목길에 색과 테마를 입히자 주민 만족도가 높아졌다. 5대 강력범죄 신고율이 줄었다는 통계도 나왔다.

(좌) 소금길 안내판 위에 '쓰레기 투기 금지' 메모가 덧대어진 모습. (우) 한쪽에 재개발이 시작된 염리동 소금길 주택가. 2018.10.12 zunii@newspim.com [사진=김준희 기자]

7년이 지난 지금, 소금길은 방치돼 있었다. 색 바랜 페인트 위로 덧칠된 흔적은 없었다. 일부 소금길 안내판엔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투기 금지 메모가 덧대어져 있다. 새로 유입된 주민들은 “범죄예방디자인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1년 6개월 전 염리동에 터를 잡은 김수진(27)씨는 “큰길가는 상점이 늦게까지 열고 사람도 많은 편이지만 골목 안쪽은 되게 어둡다”며 “무서워서 안 들어가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어둠이 내려앉은 소금길 가로등은 조도가 낮은데다 알록달록한 담장 색깔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수년 전 골목길의 골칫덩이였던 바바리맨에 대해 묻자 인근 대학에 재학 중인 2년차 주민 김초원(22)씨는 “최근까지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1년에서 6개월 전만 해도 이상한 사람들 많이 봤다”며 “그나마 주변 재개발이 시작되며 유동인구가 는 탓에 요즘 좀 나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 소금길의 한 골목. 2018.10.12 zunii@newspim.com [사진=김준희 기자]

◆소금길 30%는 남았는데.. 지자체 관심·예산 뚝↓

과거 소금길은 전체 1.7km 길이로 A코스와 B코스로 나뉘어 있었다. 염리3구역에 포함된 B코스는 올 초 재개발 공사가 시작되며 완전히 사라졌다. A코스의 일부분도 아현3구역 재개발 시작과 함께 연속성이 끊겼다.

당초 소금길이 만들어진 곳은 모두 재개발촉진지구였다. 현재는 염리4구역에 소금길의 약 30%가 남아 있다. 염리4구역은 염리5구역과 함께 지난 2016년 8월 정비구역 지정이 해제됐다.

태양공인중개사무소 박미옥씨는 “상인들의 반발이 심해 재개발 지구에서 해제됐다”면서도 “소방차가 다니기엔 길이 좁아 곧 다시 재개발 지정이 될 것 같다”고 전했다.

재개발이 시작되며 염리동의 셉테드 기능은 마비됐다. 예산 1억 8천만원을 들여 소금길을 만들었던 서울시는 ‘손을 떠났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디자인정책과 관계자는 “소금길은 재개발에 들어가 완전히 없어진 곳”이라며 소금길의 일부 지역이 재개발 지구에서 해제된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관할인 마포구청에도 염리동 소금길 담당자는 없었다. 구청 관계자는 “마을 공동체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재개발이 시작되며 운영이 안되는 있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 소금길의 색 바랜 계단벽. 2018.10.12 zunii@newspim.com [사진=김준희 기자]

소금길을 유지·보수했던 염리동 주민공동체 소금나루는 운영 장소와 지자체 예산이 끊기며 흐지부지됐다. 2014년 3월 방치된 폐가압장을 리모델링해 문을 연 소금나루는 카페와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수익을 내고 운영비를 마련해왔다.

간사를 맡았던 오미애씨는 “소금나루가 철거되며 모일 곳도 없고 수익성 사업을 할 수 없으니 유지가 불가능했다”며 “주민들이 공사하는 것도 힘겨운데 자기 예산까지 쓰기는 힘든 거 아니냐”고 토로했다.

범죄율을 낮추고자 기획된 소금길은 지자체의 무심한 속에서 ‘안전색’도 ‘취지’도 무색해졌다. 

오씨는 “처음에 잘 될 때만 자기 사업으로 가져가기 바쁘지 관심이 떨어지면 너희가 관리하란 식이 된다”며 “예산이 떨어지면 그 사업은 죽을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고 꼬집었다.

zunii@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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