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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놀이터①] 미세먼지·찬바람 잊은 어르신...공원서 "장군멍군"

기사등록 : 2018-11-2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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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탑골공원·종로공원서 '장기 대국'
"집에만 있으면 병나"...서울·경기 각지서 모여
직접 장기판 만들기도..."보이던 얼굴 안 보이면 걱정"
끼니 해결 위해 2000원 국밥·무료급식소 이용

[서울=뉴스핌] 노해철 기자 = “장이요. 나한테 상대가 안 되는구먼.” “아이고. 10년 만에 한 번 졌네. 허허.”

19일 오전 찾은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과 종로공원은 장기 한판대결을 벌이는 어르신들로 시끌벅적했다. 외통수에 걸려 승부에서 진 어르신은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외려 농담을 건네 웃음을 자아냈다. 주변에선 ‘딱딱’ 장기판과 장기알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을 찾은 어르신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장기 대국을 벌이고 있었다. 일부 어르신은 장기 대국이 벌어지고 있는 주위에 모여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노해철 기자] 2018.11.19 sun90@newspim.com

장기 대국에 참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비어 있는 자리에 앉기만 하면 된다. 서울 송파구에서 온 김상기(73) 할아버지는 “빈자리에 앉아 별말 없이 장기알을 놓으면 대국이 시작된다”면서 “장기를 두거나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가 지나간다”고 말했다.

과거 목공수로 일했던 박상재(83) 할아버지는 아예 어르신 맞춤형 장기판을 제작했다. 긴 판자 양쪽에 스티로폼으로 의자를 만들고, 가운데 장기판을 둔 형태다. 박 할아버지는 “사람들이랑 어울리려고 솜씨를 발휘해봤다”며 “아저씨들 반응이 좋아 3개를 추가로 만들었다”고 웃었다. 김 할아버지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무료로 장기판을 제공한다. 그는 여름에는 늦은 밤까지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겨울에는 날씨가 추워 오후 5시면 귀가한다.

이처럼 탑골공원과 종로공원을 찾는 어르신들은 장기 한판으로 친분을 쌓고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낸다. 일부 어르신은 장기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낀다. 경기도 구리와 안산, 인천 등 먼 곳에 거주하는 어르신도 이곳을 찾는다. 동네 양로원이나 복지관을 대신해 그들만의 놀이터로 자리를 잡았다. 마치 젊은 세대가 어울려 게임을 즐기는 ‘PC방’과 비슷한 풍경이다.

◆ 미세먼지 ‘나쁨’? 그들을 막을 순 없다

어르신은 찬바람과 미세먼지도 잊은 채 승부에 집중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서울은 큰 일교차와 나쁨 수준의 미세먼지 농도를 보였다. 탑골공원 인근에서 만난 양모(82) 할아버지는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서 매일 이곳을 찾는다. 양 할아버지는 “할 일도 없고 집에 있긴 답답해 나온다”면서 “오늘 정도면 나오기 좋은 날씨다. 미세먼지 나쁜지도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대다수 할아버지가 양 할아버지와 같은 이유로 공원을 찾는다. “일을 그만두고 할 일이 없다” “집에만 있다간 병날 것 같다” 등 방문 이유는 대개 비슷하다. 장기를 구경하던 김재철(79) 할아버지는 매일 공원에 나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김 할아버지는 “여기 장기를 두는 아저씨는 공원에서 처음 만나 십년지기가 됐다”며 “매일 방배동에서 오는 아저씨도 있는데, 오늘은 안 보이네”라고 귀띔했다.

과거 목공수로 일했던 박상재(83) 할아버지가 직접 제작한 장기판의 모습. 길다란 나무 널판 가운데 장가판이 있고 양쪽으로 푹신한 스티로품이 붙어있는 좌석이 있다./[사진=노해철 기자] 2018.11.19 sun90@newspim.com

김 할아버지에 따르면 어르신들은 서로 이름과 나이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얼굴이나 사는 동네 정도만 공유한다. 그럼에도 늘 보던 얼굴이 안 보이면 걱정부터 든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건강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김 할아버지는 “매일 나오던 사람이 갑자기 안 나오면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된다”며 방배동 아저씨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 국밥 한 그릇 2000원..."가격 싸도 맛있어"

한푼이 아쉬운 어르신들에게 탑골공원과 종로공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물가가 싸고 무료급식소 덕에 식비를 아낄 수 있어 더욱 반가운 곳이다. 

실제 탑골공원 인근 식당의 시래기 된장국은 단돈 2000원이다. 바로 옆 식당의 소고기뭇국은 2500원. 경기도 구리에서 공원을 찾은 차길수(80) 할아버지는 “지금 2000원으로 어디 가서 밥을 사 먹을 수 있냐”며 “가격은 싸도 맛은 빠지지 않는다”고 웃었다.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원각사 무료급식소 앞으로 어르신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원각사는 매일 어르신을 위해 무료로 점심을 제공한다. [사진=노해철 기자] 2018.11.19 sun90@newspim.com

이마저도 부담을 느낀 어르신들은 무료급식소를 이용한다. 원각사 무료급식소는 탑골공원을 찾는 어르신을 위해 매일 공짜점심을 제공한다. 이날 오전 11시 원각사 앞은 이미 어르신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종로 세운상가 근처 천사 무료급식소 역시 매주 3일 어르신들에게 따뜻한 점심을 대접하고 있다.

어르신들은 집 근처 노인정에선 편하게 장기 두기가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압구정동에 거주하는 송모(72) 할아버지는 “동네 노인정은 회비다 뭐다 돈만 들어가고 정이 가지 않는다”며 “여기는 돈도 안 들고 편하게 오갈 수 있어 3개월 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장기 대국을 구경하던 또 다른 할아버지는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여기 나와 장기 한판 이기고 어울리는 게 낙이라면 낙”이라고 털어놨다.

sun90@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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