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등록 : 2021-01-14 18:29
[서울=뉴스핌] 고홍주 기자 = 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로 피소돼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첫 법원 판단이 별건 재판에서 나왔다. 법원은 "피해자가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으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조성필 부장판사)는 14일 준강간치상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정모(40) 씨에게 징역 3년6월과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명령을 선고했다.
정 씨는 지난해 4월 14일 술에 만취한 동료 비서 A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박 시장으로부터 성추행을 입었다고 폭로한 피해자이기도 하다.이날 박 시장에 대한 언급은 정 씨가 피해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자신의 범행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 나왔다. 정 씨는 재판 과정에서 A씨를 추행한 사실은 인정했으나 직접적인 간음은 없었고 A씨의 PTSD 역시 제3자, 즉 박 시장의 성추행과 언론보도에 의한 2차 가해 때문일 수 있다고 혐의를 부인해왔다.
법조계 관계자는 "만일 박 시장의 성추행 사실이 없었다면 정 씨의 주장은 더 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고, 박 시장의 성추행 사실이 있었다면 어떤 범행으로 인해 발생된 피해인지를 판단해야 하니 이에 대한 판단까지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박 시장으로부터 받은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기 전인 5월 4일경 작성된 심리평가 보고서에도 오랫동안 신뢰했던 피고인으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당한 것에 대한 배신감이나 수치감, 억울함을 느꼈고 사회적 관계에 스스로 과민하게 반응하고 위축되어 있는 등 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며 PTSD를 겪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결국 재판부는 "피해자가 고(故)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으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피고인의 범행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게 법원 판단"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선고에 앞서 "성범죄 사건에 있어서 객관적 증거라는 것이 본인이 스스로 촬영하거나 녹음하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누구의 진술을 좀 더 신빙할 수 있느냐를 판단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점을 말씀드린다"고도 했다.
선고 직후 피해자 A씨 측 법률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는 "피해자가 박원순 시장 사건과 관련해 고소를 했지만 법적으로 피해를 호소할 기회를 잃게 됐는데, 피해자가 입은 피해에 대해 일정 부분 판단을 해주셨다는 게 피해자에게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 같다"고 평했다.
이어 "재판부가 두 사람만이 있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게 대부분인 성폭력 사건을 판단함에 있어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일침을 내려주셨다"고도 했다.
또 "피고인에 대한 유죄 판결, 실형 선고, 법정 구속을 통해 사법정의를 실현시켜주신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는 피해자의 입장을 전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중단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앞서 박 시장은 A씨로부터 고소당한 이튿날인 지난해 7월 9일 오전 공관을 나와 다음날 오전 0시1분 쯤 시신으로 발견됐다. 서울시 측이 공개한 박 시장의 유언장에는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며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경찰은 지난달 29일 박 시장에 대해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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