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세종문화회관(사장 안호상) 서울시극단(단장 고선웅)의 올해 두 번째 연극 '연안지대'가 전쟁과 갈등, 혼란을 물려준 부모 세대의 유산을 짊어진 자식들이 연대를 통해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14일 개막하는 '연안지대'는 레바논 출신 캐나다 작가인 와즈디 무아와드의 전쟁 4부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국내 무대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 시체를 짊어지고 장지를 찾아 나서는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과 혼돈의 삶을 살아내는 모두를 무대에서 마주하고 서로를 보듬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 윌프리드(이승우)는 어느 날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듣고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간다. 어머니를 죽게 한 아버지에게 가족묘지를 내 줄 수 없다는 친척들의 반대에 그는 시체를 짊어지고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나선다. 전쟁으로 인해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의 공간을 모두 차지한 곳에선 아버지가 묻힐 곳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바다에 다다른 윌프리드는 그 곳에서 아버지를 놓아주며 죽음과 같은 삶, 삶과 닮은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연안지대'는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던, 윌프리드의 삶이 사실은 얼마나 전쟁의 흔적과 맞닿아있는지를 차근히 보여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났던 전쟁의 한 가운데서 태어나 저마다 전쟁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또 실제로 참혹한 전쟁을 겪는 이들을 두루 만나게 된다.
이 극은 윌프리드가 시몬, 아메, 사베, 마지, 조제핀을 만나는 과정을 통해 인류의 정신을 갉아먹고, 적군과 아군조차 알아볼 수 없이 혼란스러운 지옥을 만드는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가 지고 있는 아버지의 시체만큼이나 무거운, 부모 세대가 남긴 지독한 유산을 감내하고 또 회피하고 결국은 놓아주는 방식을 보여준다.
특히 부모님의 얼굴을 모르고 자란 윌프리드가 꿈 속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되는 공간에서 자신을 수호하는 기사와 소통하는 장면이나, 이미 죽어버린 아버지와 소통하는 장면에선 마치 연극적으로 구현된 멀티버스(다중 우주) 세계를 마주하는 듯하다. 윌프리드의 정신을 붙들어주는 기사가 어머니 쟌(최나라)의 얼굴을 한 것 역시 부모가 자식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의도한 듯한 연출의 흔적이 묻어난다.
윌프리드가 아버지의 시신을 결국 바닷물에 흘려 보내기로 마음 먹었을 때, 아버지 이스마엘(윤상화)은 그러지 말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죽은 이를 어떻게 보내고 추모할 지를 결정하는 것은 산 사람이다. 각자의 마음 속 짐이자, 아픈 상처로 남아있던 부모의 그림자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대로 정리하고 보내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전쟁과 폭력에 지친 인물들은 그렇게 이스마엘을 보내며 부모와 얽힌 과거와 상처를 털어낸다.
전쟁과 아픔, 상처 속에서 살아가고 또 죽어간 모두의 이름을 읊고 멍에처럼 지고 다니는 조제핀의 등장은 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무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외치겠다는 시몬 역시 그렇다. 쉬쉬하고, 누군가는 감추려하는 진실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되묻고, 잊혀져간 이름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행위에서 다음 세대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희망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멈추지 않는 총성과 폭음은 그토록 전쟁의 세대를 증오하고도, 반복되는 현실을 그대로 담은 듯하다. 누군가는 지구 반대편의, 우리 나라와는 유리된 이야기라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은 단지 전쟁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가장 비인간적인 상징으로서, 전쟁의 폭력은 어쩌면 전쟁보다 더 참혹한 삶과 일상일 수도 있다.
레바논 내전을 온 몸으로 겪은 원작자의 의도와 메시지를 2024년의 한국의 것으로 확장하는 것은 무대 위 배우와 연출, 그리고 관객 모두의 일이다. 그리고 '연안지대'는 그 화두를 던지는 데 성공했다.
jyya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