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다”며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이 정부 출범 초기부터 삐걱대고 있다.
국민들은 여야 간 이견으로 국회에서 처리가 지연되고 있는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에 대해서도 탐탁찮아 하지만, 박 대통령이 내정한 장관후보자들에게 제기되고 있는 각종 의혹에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국민이 행복한 새 시대를 열겠다며 대표선수로 기용한 사람들이 언론과 정치권의 기본적인 검증마저 통과하지 못하는 ‘문제아’들 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여당 내부에서조차 ‘각종 의혹과 비리의 고구마 줄기’라는 비판 속에 자진사퇴를 요구받고 있는 김병관 국방부장관 후보자는 아예 논의에서 차치하자.
국회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후 최근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것은 역시 ‘전관예우’다. 과거에는 법조계에 한정됐던 전관예우가 이제는 경제·군사·교육 등 사회 모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유행하고 있다.
새 정부에서도 정홍원 국무총리, 황교안 법무부 장관 후보자,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 서남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 윤병세 외교부 장관 후보자 등이 전관예우 문제로 비판을 받았거나 받고 있다.
‘전직 관리에 대한 예우’를 뜻하는 전관예우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 것은 특정 개인이나 조직이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전직 고위 관료의 인맥이나 경험 등 후광을 이용하려 하고, 전직 관리 역시 사욕을 위해 그에 부응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전관예우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지난 2011년 판사와 검사들이 퇴직 당시 근무하던 법원과 검찰청 사건을 1년간 수임하지 못하게 하는 변호사법이 2011년 개정됐다. 소위 ‘전관예우금지법’이라 불린다. 같은 해 공정거래위원회 등 행정부의 4급 이상 공직자가 대형 법무·회계법인에 재취업하게 되면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심사를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공직자윤리법도 개정됐다.
지난 20일 국회에서 열린 정홍원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
우리보다 인사청문회가 발달된 미국의 경우 공직자들의 퇴임 이후 활동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미 법전(18U.S.C. Section 207)은 공직 재임시 직접적이고 핵심적으로 개입한(personally and substantially involved) 사안에 대해선 평생 정부와 관련해 그 누구도 대변하는 게 불가하다는 종신금지(Lifetime Ban)를 명시하고 있다.
이 법규만으로 성이 차지 않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3년 1월 20일 공포한 대통령령(Executive Order 12834)을 통해 “고위직 임명자들은 임명시 공직 퇴임 후 향후 5년간 자신이 근무했던 기관의 공무원들을 상대로 로비를 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게 하며 퇴직 공직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물론 사회적·문화적 토양이 다른 미국과 똑같이 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처럼 인맥이 많은 것을 좌우하는 나라의 법규와 제도는 더 까다롭고 엄정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청백리(淸白吏)라는 좋은 사례가 있다.
조선시대 이상적 관료상을 뜻하는 청백리는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淸廉)·근검(勤儉)·도덕(道德)·경효(敬孝)·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한 공직자에게 주던 명예로운 호칭이다. 500여년의 조선왕조 기간 중 맹사성·황희·최만리· 이현보·이황·이원익·김장생·이항복 등 217명이 배출됐다.
공직에 복무하는 목적이 사리사욕이 아니라 명예라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제도다. 물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한 공직자에게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이다. 돈 몇 억에 공직자의 자존심을 파는 행태를 피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사실 고위 관리가 고시나 공무원시험 등을 통해 공직에 입문한 후 얻게 되는 지식과 학력, 인맥 등은 개인의 것이 아닌 국가의 소유라고 봐야 한다.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직업선택의 자유는 고위공직자의 전관예우와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와 국민이 그만큼 키워줬으면 죽을 때까지 공복으로서의 명예에 만족해야한다.
최근 법조계에선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 대형 법률회사가 검사장 인사를 좌우하고 있다는 괴소문까지 돌고 있다. 검사장 퇴직 후 로펌에 가 고액의 연봉을 받아야 하고, 퇴진했다 운 좋으면 다시 고위직에 복직하는 세태가 반복되다보니 나오는 말 같지 않은 유언비어라고 믿고 싶다.
한 마디 더 첨언하자면 자신의 공직 경력을 팔아먹으려는 고위 관료뿐만이 아니라 전관예우를 해주겠다는 개인이나 조직도 규제하고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해주길 정치권에 기대해본다.
[뉴스핌 Newspim] 이영태 정경부장 (medialyt@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