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김윤경 국제전문기자] 유로존이 전체 경제 규모의 0.2% 밖에 안되는 작은 지중해 섬나라 키프로스로 인해 다시 흔들리고 있다. 물론 전 세계 금융시장도 모두 긴장하고 있다.
키프로스가 필요로 하는 자금은 약 200억달러. 이 나라 경제 규모에 맞먹는다.
국제통화기금(IMF) 규정 상 이런 돈을 한꺼번에 빌려줄 수는 없다. 유로존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키프로스에 큰 돈을 선뜻 빌려줄 의사가 없다. 그래도 파산을 맞아 유로존 경제의 근간을 뒤흔들 것을 우려, 지난 주말 유로존과 IMF는 마라톤 회의 끝에 100억유로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유로존과 IMF돈을 받는 다섯 번째 국가 키프로스에 전례없는 조건을 내걸었다. 키프로스 은행에 예치돼 있는 예금에 세금을 물려 돈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키프로스 국민들은 수용할 수 없다며 분노를 터뜨리며 현금인출기 앞을 장악하고 시위를 벌였다. 19일(현지시간)엔 키프로스 의회조차 구제금융 협상안의 비준을 거부해버렸다. 경제 컨트롤 타워인 재무장관은 사임해버렸다.
글쎄, 은행 예금에 과세를 한다는 조건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막을 돈을 빌린다는 이 조건이 우리나라에도 적용되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반응은 어떨까.
일단은 조건반사적으로 "내가 왜!"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나라 경제를 파탄으로 이끈 정책 담당자들이 책임을 져야지 왜 국민을 볼모로 하느냔 얘기가 당연히 나올 것이다.
키프로스의 경우는 더 복잡한 것이 예금주 상당수가 키프로스인이 아니라는데 있다. 키프로스 은행 예금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가 강력 반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키프로스의 예금 이자세율이 낮기 때문에 러시아 부호들이 돈을 많이 묻어두고 있는데 이번 조건을 이행하게 되면 러시아에서만 18억유로에 달하는 세금을 추징되어야 한다.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데스 키프로스 대통령은 18일엔 TV를 통한 대국민 연설에서 "국가의 파산을 막으려면 구제금융 합의안을 표결해야 한다"고 했다가 이튿날엔 "의회에선 구제금융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을 바꿨다. 의회에서 비준안이 부결되자 역시나 전 세계 금융시장은 크진 않았지만 부담을 안았다. 뉴욕 증시가 하락했고 안전자산 금값은 뛰었다.
예금 인출기 앞에 서 있는 키프로스 국민(출처=디 애틀랜틱) |
우선 예금에 대한 일회성 세금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은 앞서 얘기했듯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경제 운용의 책임을 왜 정부가 아닌 국민이 져야 하냐고 항의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공짜 돈을 주어 이런 문제 국가를 살려야만 할까. '유로존의 맏형' 독일 국민들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말도 안된다"고 항의할 것이다. 성실히 경제 생활을 하면서 낸 혈세를 왜 문제국을 살리기 위해 계속 퍼줘야 하는가란 얘기가 나올 것이다.
유로존이 돕는다는 건 결국 독일 납세자들의 돈이 들어간다는 얘기고, 키프로스에 들어갈 100억유로 가운데 30억유로는 독일 몫이다. 따라서 독일 국민들은 자꾸 쓰러지고 있는 열악한 유로존 국가들에 밑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해야하냐며 성을 내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해 키프로스 국민들보다 어찌보면 더 억울한 건 독일 국민이란 얘기다. 그렇잖아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오는 9월 총선을 앞두고 민심을 얻으려 안간힘인데 키프로스란 난제가 또 생긴 셈이다.
지난 1997년 말 우리나라가 IMF의 돈을 받을 때, 좀 거친 표현이 되겠지만 '비굴하게' 조건을 수용했던 것과는 딴판이란 생각도 든다.
IMF는 돈을 주는 대신 우리나라에 긴축재정을 할 것과 성장률 목표를 하향할 것, 기업과 금융기관 구조조정, 대기업의 체질개선, 노동시간의 유연성 제고 등을 엄격하게 요구했고 우리나라는 수용했다. 그래서 우리 경제는 IMF 이전과 이후가 너무도 확연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적용하게 됐다느니, 구조조정을 통해 체질이 개선됐다느니 IMF 구제금융을 잘 졸업해낸데 대해 우리끼리 합리화를 하기도 하지만 참 가혹한 시간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키프로스는 위기를 맞은 나라로서 구제금융 조건을 있는 그대로 무조건 수용하라, 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위기를 초래한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일 필요는 있다.
대통령과 의회가 "구제금융 조건을 못받아들이겠다"고 앞장설 때가 아니라 오히려 국민을 설득하는 쪽을 택해야 하지 않나 싶다. 메르켈 독일 총리의 말대로 키프로스에 일단 예금을 예치해 두고 이익을 누려온 만큼 러시아 역시 어느 정도 이 사안에 대해 입체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가장 근본적으로는 국내총생산(GDP) 규모의 8배가 넘도록 은행 산업을 부풀려 놓고 책임은 지지 못하고 있는 키프로스 정부와 당국에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이들이 일차적 해법인 구제금융 조건을 거부한 건 유로존 정부들과 도박을 벌이자는 꼴밖에 아닌 것 같다. 이렇게 하면 조건을 좀 완화해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모럴 해저드다. 만약 배째라 식으로 디폴트를 선언한다면 그건 더 큰 모럴 해저드다.
[뉴스핌 Newspim] 김윤경 국제전문기자 (s914@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