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이강혁 기자] "세계 흐름에 역(逆)주행하는 경제정책이다. 규제왕국으로 가고 있다."(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재계가 정부와 정치권을 향해 "할말은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엄살 떨지 말라'고 질책하고 있지만 재계는 '압박이 계속되면 국내에서 기업경영 못할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코너에 몰려 좌절하고 있는 재계가 최근 기업들의 생산기지 해외이전, 즉 '경제 엑소더스(Exodus)' 현상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생산요소 비용을 줄이고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해외 생산기지를 늘리는 추세이니 더 압박이 지속돼 경영환경이 나빠지면 국내 생산기지의 해외이전은 가속화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해야하는 기업들의 입장에서 굳이 어려운 국내 여건을 참아내며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속내가 강하게 읽힌다.
◆기업들 내모는 규제..국내 투자 계속 위축
최근 우리 기업들의 경영환경이 급속히 나빠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 정황에서도 잘 드러난다. 단적으로 글로벌 경제의 저성장 속에서 올해 1분기 국내 기업들의 영업실적도 크게 둔화된 모습이다.
기업경영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가 최근 국내 500대기업의 1분기 영업실적를 분석한 결과, '삼성전자 효과'를 제외하면 나머지 기업들의 영업실적은 전년대비 반토막에 수준을 보였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삼성전자를 제외한 500대기업들의 1분기 영업이익률은 4.5%로 전년 같은 기간의 5.2%에 비해 0.7%포인트 낮아졌다. 순이익률은 전년의 4.2%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폭락했다.
300대 기업으로 범위를 좁혀도 상황은 심각하다. 삼성전자, 현대차 등 10대기업을 제외한 290개기업들의 영업이익은 4.2%, 순이익은 2.4%에 머물며 전년 대비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대외 경영환경 불확실성도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 경제가 하반기부터 완만한 회복세를 보일 것이란 기대감도 잠시, 최근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와 중국발 신용경색 등 다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달 27일 대기업 60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83.3%의 기업이 상반기 경영실적이 당초 목표를 하회한다고 응답했다. 하반기 역시 나빠질 것이라는 응답은 전체의 40%에 육박했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경영여건이 더 좋은 곳을 찾아가는 게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대목. 더구나 국내에 경제민주화 정책까지 봇물을 이루고 있는데 고통분담 차원에서 국내에 머문다는 것은 또다른 위험요소로 받아들 수 있는 부분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들의 현재 상황에서는 국내보다는 해외행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며 "정부와 정치권이 이런 사실을 모른척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미 경제민주화 연장선에서 순환출자 규제, 금산분리, 일감몰아주기 규제 등 오너경영과 지배구조를 흔드는 방안이 현실화되고 있고, 세금정책이나 경직적 노사관계 형성 등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어느 하나 기업들의 국내 경영환경은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기업인 사기 높이고 정책적 방안 마련되야"
전문가들은 재계의 이런 분위기가 단순히 반발감 속에서 할 말을 하겠다는 수준으로 치부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기업과 기업인을 마치 죄인처럼 몰아가는데 누가 국내에 둥지를 틀고 투자와 고용을 늘려가겠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 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는 "한국 기업들의 가장 큰 성장동력은 '오너'의 성장욕구, 상속 욕구"이라면서 "그들에게서 그런 욕구를 제거하려 한다면, 그런 욕구를 인정해주는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만우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는 "이미 거론됐다 잠잠해진 기업규제조차 재론되기 시작했다"며 순환출자 규제 문제를 설명하면서 "삼성전자나 현대차 주식을 장기간 보유한 주주들은 높은 수익률로 만족하고 있는데 누가 왜 이렇게 무리한 규제를 쏟아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박호환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고용노동상황과 정부의 지원책이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기업들의 국내 유턴 가능성은 없다"며 "노동시장 유연화와 과도한 기업규제 완화 등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재계 한 고위 관계자는 "저상장을 벗어나기 위해 기업들에게는 투자와 고용을 활성화하라고 하면서도 각종 규제로 압박하는 것은 이중적 플레이"라며 "국내에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기에는 경영환경이 너무 불확실하다"고 강조했다.
[뉴스핌 Newspim] 이강혁 기자 (ikh@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