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영국에서 창간된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는 미국 뉴욕타임스(NYT), 독일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과 함께 세계 3대 신문으로 꼽힌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 닛케이)과 더불어 세계 3대 경제지로도 불린다.
이 때문인지 지난달 23일 닛케이가 FT를 인수했다는 뉴스를 접하자마자 “일본이 드디어 과거사에서 자유로운 ‘보통국가’가 되기 위해 세계를 상대로 여론전에 나섰구나”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 예측이 확인되기까지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FT는 17일 <아시아, 과거보다 미래에 중점 둬야(Asia should focus more on the future than the past)>란 사설에서 지난 14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종전 70주년 담화를 옹호했다.
아베 총리는 담화에서 러일전쟁이 식민지 지배에 고통받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줬다며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유는 세계공황과 유럽국가들의 식민지를 둘러싼 경제블록화 때문이라고 정당화했다.
FT는 이 담화에 대해 “일본이 독일만큼 확실하게 사과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아베 총리를 포함해 일부 일본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면서도 “일본은 행동으로 판단돼야 할 것”이라며 “일본은 70년간 적을 향해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았고, 평화주의가 확고히 정착돼 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역사의 교훈을 결코 잊어선 안 되지만, 이제 아시아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접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 내용은 FT의 새 주인 닛케이의 지난 15일자 <70년 담화를 근거로 무엇을 할지>란 사설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한다.
닛케이는 아베 담화에 대해 “대체로 상식적 내용으로 정리된 것”이라고 평가한 후 “담화 발표로 일단락된 것은 아니며, 담화를 근거로 지금부터 무엇을 할지가 중요하다. 한일 쌍방이 미래를 향한 선린 협력을 진행시킬 때”라고 강조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얼마 전까지 영국 자본(미디어·교육그룹 피어슨)이 지배하는 신문이었을 때도 일본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이 같은 태도를 갖고 있었을까? 아니다.
FT는 지난 4월 아베 총리의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 대해 미국에 대한 반성 외에는 아시아 이웃국가들에게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었다.
당시 신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대 내각의 사죄와 관련해 전혀 진전이 없었으며 또한 역사수정주의로 회귀하지 않겠다는 확약도 제시하지 못했다”면서 “이 점에서 아베 연설은 실망스러웠다”고 비판했다.
같은 날 다른 논평에서도 “아베 총리의 이날 연설은 역사를 기억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패턴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미 의회 연설은 오는 8월 종전70년을 맞아 발표할 담화에서 아베 총리가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과거 사죄를 희석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높인다”고 내다보기까지 했다.
외신 보도를 인용하는 데 인색하기로 소문난 일본 언론이 비싼 값을 치르고 영국 경제지를 인수한 목적이 잘 드러나는 사례다. 이미 300만명의 유료독자를 가진 닛케이가 유료독자 73만명을 보유한 FT를 인수한 가격 1600억엔(8억4400만파운드, 약 1조5000억원)은 FT의 지난해 영업이익 35년치보다 많고, 닛케이 연간 순이익으로는 16년치에 해당한다.
미국 UCLA 교수를 지낸 오마에 겐이치 일본 비즈니스브레이크스루대(Business Breakthrough University) 학장은 10여 년 전 한 일본잡지에 세계의 신문들에 대한 평점을 매긴 적이 있다.
당시 최고등급인 AA평점을 받은 신문사가 바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다. 그는 FT에 대해 “기사들의 질적 수준이 우수할 뿐 아니라 이 신문을 읽고 있으면 세상이 보인다. 일본에 대해서도 시장과 기업동향을 일본신문보다도 상세하고 정확하게 읽고 있다”고 평가했다.
FT에 이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오스트레일리아 파이낸셜리뷰(FR)가 A, 워싱턴포스트(WP) 뉴욕타임스(NYT)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 디오스트레일리안 등이 B를 받았다.
겐이치 학장은 일본 신문들에 대해선 “모두 D급”이라며 “(읽어 봤자) 어느 것이나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지역신문이고 본질을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대본영(大本營) 발표’나 옮겨 놓는 어용신문”이라고 혹평했다. 대본영은 전시에 일본 육군과 해군을 지배하는 일왕 직속의 최고 통수 기관이다.
AA급 파이낸셜타임스를 애독해온 독자로서 믿고 읽을 수 있는 신문 하나가 D급으로 변질돼 가는 과정을 지켜보자니 서운하면서도 씁쓸한 속내를 감출 수 없다.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허버트 마샬 맥루한의 명제는 참이다!
[뉴스핌 Newspim] 이영태 선임기자 (medialyt@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