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 = 전민준 기자]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 컨설팅을 맡은 베인앤컴퍼니가 강도 높은 구조조정안이 담긴 중간 보고서를 제출, 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19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베인앤컴퍼니는 최근 컨설팅을 의뢰한 한국석유화학협회 측에 중간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TPA는 기업들의 자체적 생산 감축이 아닌 상호 인수합병 하는 형태로 생산량을 줄여가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또, 폴리염화비닐(PVC), 합성고무(SBR‧BR), 폴리스티렌(PS) 등도 사업 재개편이 필요하다며 경쟁력 강화 방안을 언급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TPA는 지난해 국내 업계의 자율적인 설비감축계획에 따라 생산설비 555만t 중 95만t을 감축한 데 이어, 추가적으로 100만t 가량 줄여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위해 개별기업이 보유한 생산라인을 폐쇄하거나, 혹은 대형 기업이 중소형 기업의 공장을 인수합병한 뒤 라인 운영여부를 결정 하는 식의 재개편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TPA는 합성섬유와 페트병 등의 소재로 쓰이며, 국내 업체의 TPA 생산능력은 한화종합화학이 200만t, 삼남석유화학이 180만t으로 2위다. 이어 태광산업 100만t, 롯데케미칼 65만t, 효성 45만t 등의 순이다.
2010년 이후 TPA의 주요 수출시장이자 글로벌 수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에서 자급률이 100%를 넘어감에 따라, 국내 TPA기업들도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실제 국내기업의 지난해 중국향 TPA 수출 규모는 역대최저치인 32만t을 기록했다. 또한, 글로벌 TPA시장에서 공급증가율은 연평균 7.9%로 수요 증가율 5.4%를 앞서면서 차후 전망도 불투명 하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중국 저가제품의 경쟁력이 강해 국내기업이 원가절감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감산방향은 단순 가동률 저하가 아닌 기업 간 통폐합이다"며 "현재 원샷법을 활용해, 삼남석유화학처럼 가동하지 않는 일부 공장을 같은 지역권에 있는 한화종합화학이 매입한 뒤 운영하는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 인수합병시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베인앤컴퍼니는 PVC 경우 중국의 대대적인 설비 증설로 글로벌 공급과잉이 갈수록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 국내기업들의 감산이 불가피 하다고 전했다. 특히 중국은 저가 석탄을 원료로 PVC를 생산하는 카바이드공법 기술 수준을 높이면서 가격‧품질경쟁력을 크게 강화했다. 한국은 그간 상대적으로 비싼 원료를 소재로 하는 에틸렌공법으로 PVC를 생산하면서도 시장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 PVC가 품질까지 향상되면서 국내기업의 입지는 위축될 것으로 베인앤컴퍼니는 예상했다.
국내 PVC 연간 생산능력은 총 220만t으로, LG화학이 130만t, 한화케미칼이 90만t으로, 올해 상반기 기준 양사의 PVC설비 가동률은 약 90%를 기록했다. 그러나 올해 중국 PVC 생산규모는 약 3500만t, 글로벌 수요는 1800만t으로 수급격차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어 마땅한 대응방안 없이는 국내기업들의 생산 감축은 불가피 하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국내 PVC기업들은 납기 및 원가경쟁력 강화, 정부정책 지원으로 중국에 대응하지만 조금씩 밀리는 것이 사실"며 "아직까지 주요 수출시장인 인도에서 한국산이 앞서 있고 인도정부가 중국산에 대한 높은 덤핑 관세율을 철회할 입장이 아니어서 당분간 인도에 더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인앤컴퍼니는 BR‧SBR에 대해서는 범용제품 보다 고부가 제품 위주 판매 전략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중장기적으로 중국이 자국산 저가 범용제품 사용량을 더 늘리면, 국내 기업은 주요 수출국인 중국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실제 중국 PVC 생산능력은 2010년 연산 1790만t에서 지난해 3170만t으로 77% 늘었는데, 앞으로 1년간 60만t을 추가 증설할 계획이다.
국내에서 합성고무를 생산하는 기업은 LG화학·금호석유화학이며, LG화학은 BR·SBR 합산 기준으로 연산 36만t, 금호석유화학은 연산 87만t의 생산설비를 보유하고 있다. 양사의 합성고무 사업에 대한 매출 비중은 각각 30%, 40%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중국산 범용제품 위기는 5년 뒤부터 본격적으로 올 것"이라며 "현재 한국 PVC는 중국 범용제품과 일본 고급제품 사이에 포지셔닝 하고 있는데 고부가 제품 비중을 높여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폴리스티렌(PS)는 쇠퇴기에 접어든 제품이며, 지금까지 국내기업들은 통합과 감산으로 적극 대응해 왔다고 베인앤컴퍼니는 진단했다. 차후에도 0~1%라는 낮은 마진율은 개선될 여지가 없는 만큼, 현 추세대로 업계가 자율적인 감산으로 대응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게 베인앤컴퍼니의 의견이다.
PS는 가전기기에 들어가는 합성수지로, 글로벌 시장에서 과잉공급은 갈수록 심화돼 지난해 아시아 지역에서 PS 생산능력은 수요의 188%에 달했고, 올해는 200%를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에서는 LG화학이 연산 15만5000t 규모 PS 생산라인을 갖추고 있는데, 가동률은 약 20%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한국산 PS는 생산원가와 판매단가가 t당 100달러 차이나지만 중국산은 20~30달러 정도 차이 난다"며 "LG화학은 PS를 대체할 고부가 합성수지인 ABS 시장을 개척해 수익을 개선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이번 베인앤컴퍼니의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 보고서는 업계 자율이라는 포장과 달리 정부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가 작성 중인 시기에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가 각 석유화학기업 임원들과 접촉해 보고서에 담길 예정이던 구조조정안을 미리 설명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다는 전언이다.
이 시점은 중간보고서가 공개된 8월 18일 이전이라는 점에서 베인앤컴퍼니의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정부의 입김이 가해졌다는 근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석유화학기업 임원들과의 접촉도 '의견수렴'이 아닌 정부 주도의 '주먹구구식' 구조조정안을 단순히 확인하기 위한 절차에 불과했다는 게 석유화학업계의 판단이다.
업계 관계자는 "산업부 관계자가 언급했던 구조조정안이 중간보고서 발표에 그대로 등장했다"며 "민간 컨설팅업체가 객관적으로 판단해 제시해야 할 보고서에 산업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석유화학업계에서는 민간 주도로 구조조정을 이끌겠다는 정부의 방침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이 높아지고 있다.
[뉴스핌 Newspim] 전민준 기자(minjun84@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