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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리더] 1등 증권맨서 최대 증권사 오너로…'샐러리맨 신화' 박현주

기사등록 : 2016-12-2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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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전국 1등 지점장..전무후무 '증권맨' 등장..펀드 전성시대, '박현주' 세 글자에 열광..'인간 박현주'? '경영인 박현주'만 보라는 그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미래에셋대우 상반기 경영전략회의를 마치고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김학선 사진기자>

[뉴스핌=박민선 기자] "실세 중에 실세였죠. 그런 특혜를 받은 직원은 박현주 전에도, 후에도 없었어요."

20년도 훌쩍 지난 일이지만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박현주 지점장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입사 1년여 만에 주식운용과장으로 초고속 승진한 데 이어 서른두 살에 최연소 지점장이 됐다. 당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30여년 전 자본시장에 뛰어들었던 젊은 증권맨 박현주. 그는 지금 국내 최대 증권사의 오너가 됐다. 20년 만에 회사는 1000배 넘는 성장을 일궜다.

◆ "나는 1등 지점장 박현주입니다"

"당시 30여 개 증권사는 매월 말이면 모든 점포 실적을 집계해 서로 교환했어요. 1등 지점은 항상 동원증권 중앙지점이었으니 이 바닥에서 '박현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고 봐도 돼요." 한 증권사 고위 임원은 박 회장이 최연소 지점장, 1등 지점장이라는 타이틀을 넘어 증권맨들 간 '워너비'였다고 회고했다.

20대에 주식운용과장 자리에 오른 박현주는 당시 사내 스타였다. 장 마감 후 그가 시장에 대해 분석하며 전해주는 증시 이야기 시간은 직원들에게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모두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단다. 그가 특정 직원의 이름을 부르며 관심을 표하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부러움과 질투 섞인 푸념이 들리곤 했다.

이런 그가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지점장 때부터다. 중앙지점장 시절이던 1992년 11월 박현주는 동원증권 사상 최초로 1000억원의 주식 약정을 기록하며 지점을 전국 1위로 끌어올린다. 압구정지점장이 될 때까지 2년 연속 전국 증권지점 중 약정 규모 1위 기록을 세운 그는 1995년 최연소 강남본부장(이사)으로 발탁된다.

박현주에 대한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애정은 각별했다. 새롭게 금융업에 진출해 뿌리를 내리던 동원그룹으로선 박현주의 활약이 더없이 반갑고 귀했다. 동원증권 출신 한 인사는 "전국 1등 지점을 이끌면서 회사에 기여한 부분이 상당히 컸다. 그러니 인력 배치부터 그의 요구 사항 대부분이 받아들여질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그는 "주식 매매든 영업력이든 업무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을 정도로 정말 잘해 회장의 신임이 각별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김 회장과의 이런 달콤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샐러리맨으로 만족하지 않았던 그는 소위 '박현주 사단'으로 불리는 8명의 동원증권 직원과 함께 오랫동안 구상해온 창업 준비를 본격 시작한다. 은밀히 진행한 일이었지만 비밀은 새어나갔다. 김 회장이 박현주를 불러 사실 여부를 추궁했는데, 그 자리에서 박현주는 이를 부인했다고 한다. 결국 김 회장은 '괘씸죄'를 적용해 '박현주 사단'에 속한 직원들을 한 직급씩 강등시키는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더없이 좋았던 동원증권과 박현주의 관계가 지금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게 된 사건이다.

"김정태(전 국민은행장)처럼 좋은 인연을 이어간 사람이 있는 반면, 큰 타격을 줄 정도로 직원들을 대거 데리고 나간 경우도 있었다… 떠날 때는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재철 평전'에 실린 이 구절을 두고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들은 박현주를 염두에 둔 말로 해석하고 있다.

그를 붙잡기 위한 숱한 만류가 있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여 후인 1997년 7월, 100억원의 자본금을 마련해 미래에셋캐피탈을 만든다. 사업가 박현주는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열고 나왔다.

◆ 미래에셋 주춧돌을 쌓아가다

타고난 감각, 탁월한 추진력, 든든한 동지의 삼박자를 갖춘 박현주는 거침이 없었다. 그가 만든 첫 작품은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 그것도 폐쇄형 상품이었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설립 직후인 터라 창업 멤버들의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박현주 펀드 1호'는 판매 2시간여 만에 500억원 완판에 성공, 대박을 냈다. IMF 위기 직후 시장의 공포심과 불안감은 어느 때보다 컸다. 투자시장에 대한 신뢰 하락 등까지 겹쳐 녹록지 않은 환경이었다.

박현주를 비롯한 모든 창업 멤버들은 이 펀드의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런 노력이 결실로 이어져 수익률은 1년도 되지 않아 100%를 넘어섰다. 미래에셋그룹 한 고위 관계자는 "미래에셋의 성공적인 안착 과정에 많은 변곡점이 있었지만 국내 투자시장으로서도, 미래에셋으로서도 새로운 길을 여는 가장 의미 있는 첫 기록이었다"고 평가했다.

국내서 펀드 열풍이 달궈지던 2000년대 초반 박 회장은 해외로 영역 확장에 나선다. 홍콩, 싱가포르, 인도 등 글로벌 무대를 향해 또 한 번 무작정 뛰어든 것. "맨 처음 해외로 진출할 때 제가 싱가포르에 갔어요. 낮에도 바다가 까맣게 보였죠. 답이 없어 보였어요. '내가 여기에 왜 왔나'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죠."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매년 3~4개월씩 해외 곳곳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판 노력은 하나둘 결실로 돌아왔다. 올해 6월 기준 미래에셋자산운용은 35개국에서 181개 상품(12조2000억원)을 팔고 있다.

실체조차 없던 '펀드매니저' 문화를 만들고 바꾼 것도 미래에셋이다. 미래에셋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던 한 투자자문사 대표는 "90년대만 해도 한국투자신탁, 대한투자신탁 문화가 전부였는데 미래에셋이 펀드매니저의 기본 자세와 책임에 대해 분위기를 바꾼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미래에셋이 매니저들의 업무 집중과 체력 관리를 위해 내렸던 '금연령' 및 '금주령'은 유명하다. 미래에셋의 성장은 이렇듯 금융투자시장 곳곳에 변화를 가져왔다.

2014년 3월 미래에셋자산운용의 ‘호라이즌 코리아 코스피200 ETF’의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식에 참석한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가운데)의 모습.

박현주 신화를 만든 성공 방정식 

미래에셋캐피탈 창업 후 19년 만에 미래에셋그룹이 이룬 성장은 경이적이다. 미래에셋그룹 20여 개 계열사의 자기자본은 현재 약 11조원(2016년 6월 말 기준). 창업 당시 100억원이 20년도 채 되지 않아 1100배의 성장을 일궈냈다. 미래에셋 금융계열사(미래에셋대우 포함)가 보유하고 있는 고객자산은 무려 366조원에 달한다. 미래에셋 안팎에선 미래에셋의 성공이 박 회장 특유의 집중력과 추진력 그리고 그를 돕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입을 모은다.

◆ 하나. 타고난 재능을 키워준 스승들

박 회장의 아버지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벼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박 회장은 중학교를 수석 졸업했을 정도로 학업에서도 모범적이었다. 맏형인 박태성 워싱턴대 의대 소아신경외과 교수, 동생 박정선 명지전문대 유아교육과 교수를 비롯해 박 회장의 자녀들까지 가족 모두 '머리는 타고났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런 그에게도 방황의 시절은 있었다. 광주제일고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 새벽, 건강했던 부친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박 회장은 이 충격으로 적잖은 방황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아들을 바라보던 모친은 "대학 진학이 힘들면 여기에서 농사 짓고 살자"며 혼자 힘으로 기울었던 가세를 일으켰고, 결국 아들은 마음을 돌이켜 고려대에 진학했다. 박 회장은 2007년 자신이 쓴 책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에서 "어머니는 인생의 스승이자 최고의 조언자였다. 시골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 어머니는 생활비를 1년에 한 번만 주셨다. 돈을 계획적으로 쓰고 관리하는 습관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고 언급했다.

대학 진학까지 그의 기질을 다져준 것이 어머니였다면, 투자시장에서 기본기를 닦게 만든 것은 '백 할머니'로 불리는 명동 사채시장의 큰손 고(故) 백희엽 씨였다. 70년대부터 큰손 반열에 오른 그는 당시에도 가치투자의 정석이라고 불릴 만큼 전문적인 기업 분석력을 바탕으로 한번 사들인 종목은 2~3년 이상 보유하며 투자를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모친이 보내준 생활비를 손에 쥔 박 회장은 주식에 발을 들인 뒤 명동 증권가를 기웃거렸다. 백 할머니를 찾아가 무작정 따라다니며 "주식 좀 알려달라"고 매달렸다. 백 할머니 사무실로 출근하고 기업 탐방 때도 할머니 뒤를 따라다녔던 그는 훗날 "이때 '우량주는 반드시 제값을 한다'는 투자 원칙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덕분에 그는 대학원생 시절 투자자문사를 설립했을 정도로 투자가로서의 기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둘. 꽂히면 간다…'경주마' 본능

미래의 변화를 짚어내고, 정확히 판단하고, 과감하게 추진하는 박 회장의 능력은 많은 기록을 남겼다. 1999년 다음커뮤니케이션에 투자해서 1000억원가량의 대박 수익을 거둔 것이 그렇고, 해외법인 설립과 부동산으로의 투자 영역 확대가 그렇다. 2005년 SK생명보험 인수에 이어 2015년 대우증권 인수, 그리고 PCA생명 인수까지. 결정을 하기까지는 신중하지만 한번 내린 결정은 과감히 밀어붙이는 그의 추진력은 경주마를 연상케 한다.

최근 미래에셋 배지를 새롭게 단 미래에셋대우 임직원들은 그의 과감한 추진력에 혀를 내두른다. "익히 들어왔지만 실제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적잖이 놀랍니다. 빠르고 정확한 데다 단호합니다. 추진력에선 어떤 리더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끝없는 도전 정신도 높이 살 만한 부분이다. 최현만 미래에셋그룹 수석 부회장은 "투자운용업에 대한 회장님의 자세는 한 번도 흐트러지거나 빈틈이 없었다. 오로지 투자운용업을 바라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오늘날 미래에셋이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고 했다.

◆ 셋. 불가능을 현실로…'승부사' 기질

박 회장에게 따라붙는 수식어인 '승부사'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낸 '사건'은 대우증권 인수전이다. 박 회장이 적어낸 인수가액이 공개됐을 때 경쟁사 곳곳에선 탄식이 터져나왔다. '상대가 박현주였음을 간과했다'는 뒤늦은 후회도 있었다. 대우증권 장부가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감안한다면 2조원대 안팎에서 승부가 날 것이라는 게 시장의 예상이었지만 박 회장은 이러한 '평범한'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2조4000억원이라는 거금을 적어냈다. 박 회장 스스로도 "그 금액을 쓸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사실 대우증권 인수에 대한 그의 본심은 2015년 12월 '본게임' 전까지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해 여름까지 인터넷전문은행 사업 진출에 올인하는 듯 보였던 미래에셋이 돌연 포기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카카오와 컨소시엄 구성에 실패한 데 따른 결정이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하반기 1조원 규모의 유상증자 결정 역시 자기자본을 확충해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인가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 혹은 미래에셋생명 등 계열사 지분 취득에 사용될 것이라는 시나리오들이 이곳저곳에서 그려졌다. 되돌아보면 박 회장에게 이 모든 추측은 '평범한 발상'이었다. 대우증권 인수 실패 시 대안을 내놓으라는 주변 지적에 대해 박 회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되레 직원들에게조차 "대우증권을 누가 살 것 같냐"며 속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신년사에서 미래에셋그룹의 자기자본을 3년 내 10조원까지 만든다고 했죠. 사실 그게 대우증권 M&A 얘기였습니다. (인수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한 1년 된 셈이죠". 지난해 말 대우증권 인수 확정 후 기자들 앞에 선 박 회장은 "말하지 않는 게 제일 힘들다는 사실을 배웠다"며 대우증권 인수는 철저한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자산운용업에 기반을 둔 5위 증권사 미래에셋이 1위 대우증권을 인수한다고? 대부분이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사건'을 만들기 위해 박 회장은 차근차근 디딤돌을 쌓았던 것이다.

◆ 넷. 박현주의 사람들

한번 눈에 든 사람은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내 사람으로 만든다. 박 회장의 인재 욕심은 유명하다. 하지만 미래에셋 출신 인사들은 그 못지않게 박 회장에 대해 인복(人福)이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성장세가 처음부터 컸던 것은 아니다. 2002년 설정액 2조원 수준에서 2007년 50조원 규모로 성장하기까지 초창기 멤버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말 그대로 창업자 정신을 갖고 회사를 키우겠다는 의지가 뜨거웠던 시기다. 미래에셋자산운용으로 몰려드는 자금을 바라보며 같이 웃고 울던 원년 멤버들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박 회장의 뛰어난 능력은 항상 돋보였고, 그래서 좋은 인재가 주변에 많았죠. 미래에셋이라는 회사를 멋지게 만들어보겠다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유독 박 회장 곁엔 많았습니다."

하지만 창업 20년이 가까워진 지금, 함께했던 원년 멤버들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공동 창업멤버였던 송상종 대표, 삼고초려 끝에 미래에셋의 전성기를 함께 구가했던 김영일 매니저, 이병익 매니저, 선경래 매니저, 그리고 23년을 함께했던 구재상 부회장까지. 모두가 미래에셋을 떠났다.

"당시 나를 포함한 우리 팀에서 관리한 펀드 운용 규모가 10조원 수준이었어요. 매년 수수료로만 700억원가량 벌어들인 거죠.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대우가 따르지 않았어요. 수익률이 떨어지던 한때는 임원들 임금을 깎기도 했어요. 이런저런 서운함을 느낀 사람이 많았죠."

"사람과의 정에 연연해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본인 회사의 성장과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철저한 경영인이죠. 함께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음을 느끼고 떠난 이가 많아요. 물론 그렇기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미래에셋을 떠난 이들은 하나같이 경영인으로서 박 회장은 최고라고 기억했다. 하지만 '인간 박현주'에 대한 질문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아꼈다.

아픔으로 남은 인사이트펀드 

지난해 12월 미래에셋증권이 대우증권 인수를 확정 지은 뒤 나간 기사와 관련해 한 독자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자신을 미래에셋 인사이트펀드 투자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인사이트펀드로 인해 손실을 입은 투자자가 얼마나 많은데 박 회장이 투자 대가이고 명인이냐"며 분노를 드러냈다.

최소 가입금액 1000만원, 선취수수료 1%, 연간 보수 2.49%. 지금 기준으로도 콧대 높은 조건들이었다. 해외법인들의 사업을 확장하고 네트워크를 구성하던 시기에 필요한 비용이었다. 이 펀드는 출시 반년 만에 4조8000억원까지 불어나며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천운도 미래에셋을 돕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투자 비중이 높았던 인사이트펀드는 2008년 9월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전이된 글로벌 증시 하락세를 버텨내지 못하고 가라앉기 시작했다. '반토막 펀드'라는 오명이 딱지처럼 붙어버린 이 펀드는 2009년 이후 현재까지 매년 수천억원대의 순유출세를 기록 중이다. 수익률도 마이너스 영역에 머물고 있다.

"미래에셋이 쌓아가던 투자자 신뢰의 30% 이상을 그때 잃었던 것 같다." "100% 성공만 할 수는 없겠지만 인사이트펀드는 미래에셋에, 그리고 박 회장에게 아픈 상처다." 전·현직 미래에셋인들 모두가 같은 평가를 내리는 부분이다.

박 회장은 "환헤지를 하는 구조로 만든 것이 문제였다"며 "환율이 그렇게 갈 것을 예측 못한 것은 잘못이고 부족했다"고 아쉬움을 보였다. 인사이트펀드의 현 설정액은 5000억원 남짓. 투자자들은 "미래에셋뿐 아니라 한국 자산시장을 위해 '인사이트펀드'는 반드시 좋게 하겠다"던 그의 약속이 지켜지길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박현주 '1인 체제', 눈길 끄는 가족사 

박 회장의 가족관계는 또 다른 관심거리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캐피탈, 미래에셋컨설팅,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대주주로 미래에셋그룹을 지배하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미래에셋자산운용 지분 33%를 보유 중인 미래에셋컨설팅의 경우 박 회장(48.63%)을 비롯해 부인 김미경 씨(10.2%)와 세 자녀가 각각 8.19% 지분을 갖고 있다. 동생 박정선 씨(5.69%)와 두 조카(송성원, 송하경 각 1.37%)의 지분까지 합하면 친족들의 지분율은 무려 91.86%에 달한다. 경영자로서 박 회장의 활동이 앞으로 상당 기간 지속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 훗날 미래에셋그룹의 후계구도를 점쳐보는 이가 많은 이유다.

특히 미국 코넬대 인문학부에서 사학을 전공한 뒤 올해 스탠퍼드대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시작한 장녀 하민 씨는 후계구도를 두고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이다. 맥킨지컨설팅 한국법인(인턴), 미국 부동산투자컨설팅 업체 CBRE 등을 거쳐 지난 2013년에는 미래에셋자산운용에 입사해 해외부동산투자본부에서 호텔 투자 업무를 맡은 바 있다.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도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근무하는 데 있어선 여느 직원처럼 평범하면서도 성실했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미래에셋자산운용 미국법인 본부장을 맡고 있는 토마스 박은 박 회장의 큰형인 박태성 교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심을 받고 있다. 그는 시카고대 MBA 졸업 후 골드만삭스에서 인수·합병(M&A) 전문가로 활동한 경력을 살려 미래에셋그룹의 해외 비즈니스에서 핵심 키맨의 역할을 하고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출신 한 관계자는 "해외 비즈니스에 있어 전문성을 갖고 있고, 실제 굵직한 업무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박 회장의 신임을 계속 받아온 사람"이라며 "앞으로 미래에셋그룹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미래에셋 본사 사옥의 모습. <사진=이형석 사진기자>

◆ 운용에서 증권·보험으로…'불가능'에 도전하다 

미래에셋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는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중심으로 하던 무게 추는 증권과 보험으로 영역을 확장해 금융그룹으로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은 설립 17년 만에 초대형 증권사로 재탄생했다. 지난해 상장 이후 성장세를 본격화하고 있는 미래에셋생명은 PCA생명 인수에 성공하며 업계 상위권으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나섰다.

투자 대상 역시 달라졌다. 주식형펀드를 통해 잡은 기틀을 바탕으로 국내 및 해외 부동산시장을 비롯한 대체투자(AI)의 선두에 있는 미래에셋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박 회장은 연내 1조원 규모의 벤처투자펀드도 내놓을 계획이다. 향후 10년간 벤처에 1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그의 구상이 실현되는 시발점인 셈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도전은 더욱 거침없이 이뤄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미래에셋 계열사들이 대그룹 반열에 오를 정도로 성장하면서 진출 가능한 영역이 더욱 많아졌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우리가 금융의 '삼성전자'를 만들려면 불가능한 꿈을 꿀 줄 알아야 합니다. 상상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시간이 가면서 큰 꿈을 갖고 증명하겠습니다."

적잖은 성장통과 좌절, 시기와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2016년 자본시장 한복판에 서 있는 미래에셋, 박현주의 변화와 도전에 대한 안팎의 관심은 갈수록 커진다. 국내 최대 증권사의 오너로 최선봉에 오른 그의 성공이 국내 자본시장의 한 단계 도약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이도 많다. 미래에셋의 살아 있는 성공신화를 만들어온 박현주. 그의 전성기가 오늘이 아닌 내일이길 기대해본다.

<박현주 인맥 관계도>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사업가인 박현주 회장의 인맥은 대부분 금융계 인사들로 미래에셋그룹과 연계돼 있다. 광주일고 출신 가운데에는 고(故)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이 대표적이다. 어느 날 불쑥 찾아와 "과장 자리를 달라"던 박 회장 특유의 패기를 알아보고 그를 동원증권에 영입한 김 은행장은 박 회장의 친형과 동창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기질이 많이 닮아 동원증권 시절 김 은행장이 박 회장을 아꼈다는 이야기도 언급되곤 한다. 특히 김 은행장이 동원증권 대표이사 재직 시절 창업을 위해 나가겠다는 박 회장을 놔줬다는 이유로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그와 6개월간이나 말조차 섞지 않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송상종 피데스투자자문 사장과 장인환 전 KTB자산운용 대표는 박 회장과 광주일고 52회 동창으로 80년대 후반 동원증권에 함께 근무하던 시절 '3인방'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또 다른 동창 오규택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박 회장의 동생 박정선 씨와 결혼해 가족의 연을 맺었다. 정찬형 포스코기술투자 대표(전 한국투자신탁운용 부회장)는 광주일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함께 다니며 학창 시절의 상당 기간을 함께했다. 고려대 경영학과 동문으로는 이찬근 블루런벤처스캐피탈매니지먼트 한국대표,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부회장, 장옥수 전 부국증권 사장 등도 있다.

업계 인맥은 대부분 전·현직 미래에셋그룹 임원에 포진해 있다. 최현만 미래에셋그룹 수석 부회장은 신입사원 시절부터 박 회장의 눈에 들면서 1997년 서초지점장 시절 미래에셋캐피탈을 함께 설립한 대표적 인물이다. 또 한 명의 핵심 인사로 꼽히는 구재상 케이클라비스자산운용 부회장도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장 시절 박 회장과 함께 퇴사했던 창업멤버 중 한 명으로 2012년까지 미래에셋그룹의 성장을 이끈 주축이었다. 최 부회장과 같이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정상기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은 구 전 부회장의 뒤를 이어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이끌다 최근 에너지인프라운용 대표로 이동했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미래에셋에서 투자교육을 담당했던 강창희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대표도 박 회장의 곁을 지키던 인사 중 하나다. 동원증권 영업이사 시절 박 회장을 당시 최연소 지점장으로 발탁했던 유성규 전 미래에셋증권 부회장은 2001년 미래에셋증권으로 자리를 옮겨 현역의 마지막을 미래에셋에서 마무리했다.

 

[뉴스핌 Newspim] 박민선 기자 (pms0712@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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