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이강혁 기자] ## 어느 자그마한 동네 앞 4차선 도로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있다. 동네 주민들은 수십년 동안 반대편 큰 동네를 오갈 때 이 횡단보도를 이용했다. 이 동네 주민들은 반대편 동네에서 요청이 있을 때마다 횡단보도를 건너가 일을 도왔다. 품삯은 우리동네와 반대편 동네를 더 좋게 만드는데 쓰인다고 했다. 힘들고 지쳐도 그들이 오라면 안갈 수 없다.
어려움도 있다. 차가 오가는지 살피며 건너는 것이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과속차량에 치어 다치는 주민도 여럿 나왔다. 동네 어귀 순이네집 아저씨는 크게 다쳐 수개월째 일을 쉬고 있다. 하지만 반대편 큰 동네의 힘좀 쓰는 주민대표들은 이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것이 서로에게 편하니 계속 이곳으로 다니라고 했다.
삼성 서초타운. <사진 = 뉴스핌DB> |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선 동네 주민들은 황당했다. 간밤에 횡단보도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사연인 즉. 반대편 동네 주민들이 밤새 이 횡단보도를 지웠다고 한다. 힘좀 쓴다는 그 주민대표들이 잘못을 많이 해서 그렇단다. 그러면서 수십년 전 이곳에 누가 횡단보도를 만들어 놨는지 모르겠으나, 100m를 돌아가면 육교가 있는데 왜 이곳으로 다녔느냐고 따져 묻는다.
반대편 동네 주민 일부는 육교가 아닌 횡단보도를 이용한 책임을 자그마한 동네 주민에게도 따져 묻겠다고 벼른다. 힘좀 쓰던 주민대표들 벌을 주려면 당연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한 통속이라는 색안경이 씌어졌다. 그러면서 큰 동네 주민대표에게 자주 꾸지람을 듣던 자그마한 동네의 부잣집 아들을 잡아다가 경을 치겠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횡단보도를 이용하라던 반대편 동네의 힘좀 쓰던 주민대표들은 모두가 입을 굳게 닫았다. 나는 모르겠다란다. 이제는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도 한다. 고개를 떨군채 애써 외면한다. 자그마한 동네 주민들. 그저 잡혀간 부잣집 아들만 안쓰럽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관계자들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재판을 빼놓지 않고 모니터해왔다는 한 재계 관계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4일 이 부회장 등 삼성 관계자에 대한 '최순실 게이트' 관련 공판(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7부·김진동 부장판사)에서 만난 복수의 재계 관계자와 삼성 관계자의 말도 비슷하다.
"수십년 동안 그 길로 다니라고 해서 다녔다. 오라면 가고 달라면 줬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분담하라고 정해주는데로 내는 게 관례이고 관행이었다. 줘 패는데 안낼 수 있겠나. 유독 삼성에만 뇌물죄를 적용을 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모두가 답답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이날 오전 공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이런 재계의 심경은 삼성 측 변호인단에게서도 역력히 읽혔다.
오전 공판에는 우리은행 삼성타운점 직원 김 모씨가 출석했다. 김 모씨는 삼성이 코어스포츠에 컨설팅 계약 명목으로 준 390만유로에 대한 송금절차를 담당했다. 이와 관련해 특검은 코어스포츠에 송금된 돈이 재산국외도피죄 및 외국환 거래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예치사유에 기재된 사유가 허위라는 논리를 폈다. "예금거래신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문제를 삼았다.
이에 대해 삼성 측 변호인단은 "송금절차만 담당한 증인이 컨설팅 용역계약의 진위여부와 외국환거래법의 입법취지를 알 수 없다"며 항의했다. 한편으로는 "특검 공소사실에는 가정(假定)만 가득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김 모씨도 특검의 주장에 대해 "삼성은 예치사유 기재시 우수마필과 부대차량 구입이라고 자세하게 기재했다"면서 "은폐하려는 목적이라면 송금액의 사용처를 상세하게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검은 색 양복과 흰색 와이셔츠의 차분한 복장으로 공판에 출석한 이 부회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특검과 변호인단의 공방을 지켜봤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학선 기자 yooksa@ |
사실 다음달로 예정된 선고공판에서 재판부가 어떤 판결을 내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3개월 가량 이어지고 있는 공판과정에서 "증거가 차고 넘친다"던 특검이 내놓은 구체적인 물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재계에서는 구체적인 물증이나 증언도 없이 '정황상'이란 가정 논리가 많다고 비판한다.
특검이 이 부회장 등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삼성이 최순실의 영향력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여부나,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부정한 청탁을 했는지 여부 등 쟁점사안에 대해 명쾌하게 입증을 해야 한다.
하지만 특검은 삼성 측 변호인단의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강요에 의한 승마 지원이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등 현안 해결을 위한 부정한 청탁이 결코 없었다"는 핵심 주장에 대해 40여명의 증인을 출석시켰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8차 공판에서 최순실의 딸 정유라를 깜짝 등장시켜 '삼성이 말세탁 과정을 몰랐을 리 없다'는 삼성에게 다소 불리한 증언을 내놨지만, '삼성 소유였고 정유라가 빌려 탄 것일 뿐'이라는 삼성 측 신문에 정유라가 "내 말이 아니었다"고 동의하는 등 오락가락한 진술행태를 보여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특검이 이해가 안된다거나, 정황상 그렇지 않느냐는 추정형태의 같은 질문만 계속하다보니 삼성 측 변호인이나 심지어 재판부에서도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고 불만을 터뜨린다"면서 "안종범 전 수석 수첩 속 '말씀자료' 등 제시된 증거도 그 경위와 목적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등 증거로서는 명쾌하지 않다"고 평했다.
"대가를 바라고 지원한 일은 결코 없다. 특히 합병이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는 특검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법원에서 잘 판단해 주시리라 믿는다."
이날 재판을 참관하던 한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당시 밝혔던 이같은 공식입장문을 언급하면서 "아닌 것은 결코 아닌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동안 삼성 측은 박 전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지원한 것이며 어떤 대가도 없다고 일관된 주장을 해왔다. 승마 지원도 영수증까지 챙겨가며 회계처리를 했는데 횡령이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반박이다.
한편, 이날 오후 공판에는 '삼성 저격수'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증인으로 나온다. 김 위원장은 지난 2월 특검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등 삼성 지배구조와 경영권 승계에 대한 의견을 낸 바 있다.
[뉴스핌 Newspim] 이강혁 기자 / 재계팀장 (ikh@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