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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타히티 섬에서 원시를 그린 화가, 폴 고갱

기사등록 : 2017-12-0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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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30)

지금까지 미술 작품 공개경매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은 무엇일까? 지난 2015년 5월 11일,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현대 미술품 경매의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졌다. 파블로 피카소의 유화 《알제의 여인들》이 1억 7,936만 달러에 낙찰돼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그 이전의 최고 경매가 작품은 2013년 1억 4,240만 달러에 낙찰된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였다.
그러나 공개경매와 개인거래를 통틀어 회화 거래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은 이들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프랑스 후기인상주의 화가였던 폴 고갱의 1892년 작품 《언제 결혼하니?》이다. 지난 2015년 2월, 스위스 바젤에서 진행됐던 비공개 경매에서 이 작품은 무려 3억 달러에 중동의 왕족에게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전의 비공개 경매 최고가 기록은 2011년 4월, 2억 6,000만 달러에 팔린 것으로 알려진 폴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에서 생활하면서 그린 초기작에 해당된다. 작품에는 검게 그을린 피부의 두 여인이 화면 가득 위치하고 있으며, 배경에는 타히티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녹색 들판과 여인들의 붉은 옷, 그리고 배경의 푸른색 등의 강렬한 색상들은 작품의 단순한 형태들과 어우러져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언제 결혼하니?’, 유화 캔버스에 유채, 77 Ⅹ 101 cm / 바젤 미술관 <사진=이철환>

일반적으로 고갱 그림의 특징은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이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바탕, 실제 대상의 색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라 할 것이다. 그는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여냈다. 이처럼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문명을 혐오하고 원시와 자연을 예찬했다는 특징도 있다.

폴 고갱의 또 다른 대작으로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가 있다. 이 작품은 고갱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던 1897년에 그려진 것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건강 악화와 빈곤, 딸의 죽음으로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던 고갱은 이 작품을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에 완성하였다. 제목은 자신이 직접 붙였으며 습작 데생을 거치지 않고 직접 캔버스에 작업하였다. 고갱의 작품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작품이며, 스스로 이 작품을 자신이 그린 모든 작품을 능가하는 역작이라고 말했다.
그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누워 있는 어린 아기를 통해 우리의 과거를 묻게 되고, 그림 중앙에 서서 익은 과일을 따는 젊은이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보게 된다. 또 화면 왼쪽 아래 웅크리고 귀를 막아 닥쳐올 고통을 괴로워하는 늙은 여인의 모습에서는 우리의 미래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즉, 인간의 탄생, 삶 그리고 죽음의 3단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림 왼쪽 윗부분에는 타히티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속 여신의 상이 있고, 여신 곁에는 자신의 원주민 아내 파우라와의 사이에서 탄생했으나 얼마 후 죽은 딸아이가 그려져 있다. 분신처럼 아끼던 딸아이를 여신의 힘을 빌려 되살리고자 한 것이다.

폴 고갱 (Paul Gauguin, 1848~1903)은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혁명의 정치적 혼란기를 피하려고 고갱이 태어나자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이주할 결심을 한다. 하지만 페루로 가는 여객선 안에서 그의 아버지는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폴 고갱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페루 리마에서 불행하게 시작되었다.
1854년 고갱의 가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에 정착하게 된다. 프랑스로 돌아와서도 그의 가족은 여전히 가난하였다.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던 어머니를 돕기 위해 고갱은 배를 타는 선원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 1872년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 사무실에 일자리를 얻는다.
1873년에는 덴마크 여성인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지게 된다. 5명의 아이도 생겼다. 이 무렵부터 고갱은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1882년 어느 날, 그는 증권사 직원을 그만두고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35세에 전업화가가 되려는 그를 가족은 물론이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화가들도 크게 놀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과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돈벌이가 없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아내와의 사이도 나빠졌다. 결국 타히티로 떠나기 직전인 1891년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가족들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후 파리에서 고갱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인연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신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이며 화상인 테오 반 고흐였다. 고갱은 고흐의 초청으로 남부 프랑스 아를에 있는 ‘노란 집’, 즉 고흐의 집에서 9주일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며 작업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나게 된다.

한편,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을 접하고서 그는 원시적인 생활을 동경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1891년 2월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는 이국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타히티는 작품의 소재를 얻을 곳, 영감과 쾌락을 제공할 곳이었지 결코 그가 평생 거주하다가 뼈를 묻을 곳은 아니었다. 몇 달이 지나자 그는 고독과 향수를 느낀다. 돈도 떨어진 지 오래였다. 결국 그는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1893년 6월 다시 배에 오른다. 약 2년 동안 타히티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독특하고 과감한 색채가 돋보이는 60여점의 회화와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
파리로 돌아온 이후에도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다. 반 고흐 형제를 비롯해 그의 친구와 후원자들이 상당수 사망했고, 미술계의 유행도 이미 바뀌어 있었다. 개인전을 열어 타히티 시절의 작품을 선보였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후 흑인 혼혈 여성 안나 라 자바네즈를 모델 겸 애인으로 삼아 새로이 창작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우발적인 폭력 사건에 휘말리면서 둘의 관계는 끝나버린다.
사실 고갱의 여자관계는 상당히 복잡한 편이었다. 죽음의 원인도 성병인 매독이었다. 그는 파리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타히티에서도 몇 차례 원주민 여성과 결혼과 동거를 거듭했다. 개중에는 13세의 미성년자 소녀도 있었다. 타히티 원주민 소녀 파우라는 열네 살이던 1896년부터 고갱과 동거 생활을 시작했고 이듬해 고갱의 딸을 낳았다. 그러나 아이는 태어난 지 몇 주 후에 죽고 만다.

연이은 좌절을 겪은 고갱은 프랑스를 영원히 뜨기로 작정한다. 다시 타히티로 가려는 것이었다. 떠나기 직전 고갱은 자신이 타히티로 가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이 목가적인 섬과 원초적이며 순박한 주민에게 매료당했기 때문이지요.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려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을 이루려면 근원으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해요. 나의 이브는 동물에 가깝습니다. 벌거벗었는데도 음란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래서예요. 그리고 떠나기 전 타히티 생활을 소개한 책을 펴낼 생각입니다. 그 책의 제목은 ‘노아노아(Noa Noa)’, 타히티 말로 ‘향기로운’ 이라는 뜻이지요.”
1895년 6월에 파리를 떠난 고갱은 9월 초에 다시 타히티의 파페에테에 도착한다. 하지만 폭력사고로 입은 골절상의 후유증에다 젊은 시절 얻은 성병이 재발하여 그의 몸은 이미 크게 망가져 있었다. 고갱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심지어 자살까지도 시도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붓을 놓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타히티 원주민 여인들을 모델로 한 여러 점의 작품과 최후의 대작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있다.
1901년, 고갱은 타히티를 떠나 거기보다도 상대적으로 덜 문명화된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Hiva Oa) 섬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러나 거기서 백인 관료와 선교사의 전횡을 목도하고 이를 고발하여 법정 다툼을 벌이다 패소하고 만다. 이후 건강 악화로 한 달 넘게 병상에 누워 있던 고갱은 1903년 5월 8일,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그곳에 있다.

고갱이 사망한 지 1년 뒤인 1904년, 파리에 온 어느 젊은 영국인 작가는 얼마 전까지 타히티에서 살다가 사망한 프랑스인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을 느낀다. 그의 일생이 흥미로운 소재라고 생각한 이 영국인은 13년 뒤인 1917년에 타히티를 직접 방문해 고갱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이 작가는 바로 윌리엄 서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이었다. 서머셋 모움은 고갱의 생을 기본소재로 삼아 소설 《달과 6펜스 (The Moon and Sixpence, 1921)》를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생전에 이름 없는 화가로 살았던 고갱을 세상에 알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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