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김세혁 기자 = [여기!서울]은 1000만 시민의 도시 서울 곳곳의 명소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핫플레이스는 물론, 미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공간을 만나보세요.
◆18년 만에 개방된 양녕대군 묘역
서울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1호 ‘양녕대군 이제 묘역’은 지난 2000년 서울시와 동작구가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일반인 출입을 제한했던 곳이다.
현재 사유지인 이곳은 지난달 말 18년 만에 시민을 위한 휴식·문화·교육 공간으로 전면 개방되면서 매일 방문객이 즐겨 찾는 명소로 떠올랐다.
‘양녕대군 이제 묘역’은 동작구 상도역에서 국사봉터널 방향으로 난 왕복 2차선 도로변에 자리한다. 옛 정취가 가득하면서도 주변의 아파트나 빌라와 묘한 조화를 이루는 특별한 곳이다.
양녕대군의 사당(지덕사)은 숙종 1년(1675년), 임금이 명을 내려 세웠다. 원래 숭례문 밖에 있었는데 1912년 현재 자리로 옮겼다. 세조가 친히 붙인 ‘지덕’은 인격이 덕의 극치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묘역 전체는 정원처럼 아름답게 조성돼 있다. 묘역을 지키는 양명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온갖 꽃나무가 반긴다.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의 묘역, 사당, 정원으로 향하는 길이 세 방향으로 나 있다.
오른편 오솔길 끝에 자리한 사당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 옆 연못을 건너면 묘역으로 향하는 돌계단이 보인다. 오른편에 빌라가 자리를 잡았는데, 일상 대화가 들릴 만큼 가깝다. 2018년 서울과 조선시대가 맞닿은 공간이다.
묘역 가장 위에 자리한 양녕대군과 부인의 능은 소박하다. 양녕대군의 유언대로다. 조선 최고의 풍운아가 잠든 묘역을 지나면 양명문으로 나가는 돌계단과 오른쪽 작은 숲길이 보인다.
양명문 왼편의 탁 트인 정원에는 명필로 유명한 양녕대군이 초서체로 쓴 후적벽부와 숭례문 현판 탁본이 우뚝 서있다. 양녕대군의 숭례문 현판은 2008년 화재 때 소방대원이 소실을 염려해 얼른 떼어낸 일화로 유명하다. 현재 현판은 이 탁본을 기초로 복원됐다.
참고로 양녕대군의 글씨는 조선시대 최고로 친다. 숭례문 현판이 임진왜란 당시 왜적 손에 사라진 적이 있는데, 청파동 연못에서 광채가 솟아 들여다보니 현판이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만 평이 넘는다지만 묘역은 전체적으로 단아하다. 가족, 연인과 함께 산책을 즐기기 적당하다. 무료 개방 시간은 매주 화~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화장실도 마련돼 있다. 사유지인 관계로 고성은 금지다.
◆대인배냐 소인배냐…두 얼굴의 풍운아 양녕대군
조선 태종(이방원)의 맏아들인 양녕대군(1394∼1462)은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세종)의 형이다. 원래 자기 위로 형이 셋 있었지만 모두 죽어 맏이가 됐다.
양녕대군은 태종에 의해 세자가 됐지만 기행을 일삼아 폐세자가 되고 말았다. 충녕이 인물임을 알아보고 일부러 왕의 눈밖에 났다는 비하인드 스토리에 사람들은 대인배라고 칭송했다.
그런데 양녕대군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도 있다. 스스로 왕위를 차버리고 궁궐 밖을 떠돈 풍운아 이미지 한편에는, 평생 주색만 탐한 소인배도 모자라 세조를 부추겨 왕실을 박살냈다는 비판도 만만찮다.
분명한 건 양녕대군이 끝내주는 풍류가였다는 사실이다.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불사를 지을 당시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불심이 지극한 효령은 절 한쪽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 양녕이 못마땅해 “아우가 불공을 하는데 너무하지 않소”라고 나무랐다.
이에 양녕은 “나는 살아서 왕의 형이 돼 부귀를 누리고, 죽어 부처의 형이 돼 보리에 오를 터이니,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웃어넘겼다. 물론 왕은 세종을, 부처는 효령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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