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김규희 기자 =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및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 김명수 대법원장의 최종 결정이 주목된다.
일선 소장·중견 판사들조차 검찰 수사를 피할 수 없다는 등 강경한 입장이지만, 신중한 의견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김 대법원장의 판단에 따라 사법부 내부 균열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되는 가운데, 현직 판사들이 사법부의 독립 보장을 촉구한 과거의 사법파동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지난달 25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의혹 및 법관 사찰에 관여한 정황이 담긴 문건 98개를 공개한 이후 전국 판사들은 회의를 개최하고 의견을 모았다.
[고양=뉴스핌] 이형석 기자 = 11일 오전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국법관대표회의에는 각급 법원 판사회의에서 선출된 법관 대표 110여명이 참석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에 대한 처리 방안을 논의한다. 2018.06.11 leehs@newspim.com |
◆ ‘사법 농단’, ‘사법 파동’으로 이어질까
특별조사단 발표 이후 이뤄진 대부분의 판사회의는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가 사법부 신뢰와 법관의 독립을 훼손시켰다는 인식을 같이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다짐했다.
일선 소장·중견 판사들은 검찰 수사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대법원의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1일 의정부지법 단독판사를 시작으로 전국 최대 규모인 서울중앙지법 단독·배석판사, 대구지법 단독판사, 부산지법 단독·부장판사, 대구지법 배석판사 등은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잇따라 발표한 바 있다.
그 중에서도 인천지법 단독판사와 부산지법 배석판사, 서울북부지법 단독·배석판사 등은 대법원이 검찰에 수사의뢰 등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하지만 부장판사급이 포함된 회의와 전국법원장회의에서는 형사 조치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은 법원의 수사의뢰 등 조치에 반대하는 의사를 명시했고 전국법원장들은 “‘재판거래’ 의혹은 합리적 근거가 없으며 사법부에서 고발, 수사의뢰 등 조치를 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혔다.
지난 11일 전국법관대표회의는 형사 절차를 포함한 진상 조사를 요구하면서도 대법원장이 직접 고발에 나서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결론 내려 검찰 수사를 포함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일선 법관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경기=뉴스핌] 이형석 기자 =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박근혜 정부 당시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법원행정처 ‘재판거래’ 파문 등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18.06.01 leehs@newspim.com |
◆ 과거 4차례 ‘사법 파동’...무슨 일로 일어났나?
이른바 ‘사법파동’은 현직 판사들이 사법부의 독립 보장과 개혁을 요구하며 벌이는 집단행동을 가리킨다. 지난 1971년을 기점으로 1988년, 1993년, 2003년 총 네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법파동은 1971년 일어났다. 이규명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가 서울형사지법 이범렬 부장판사 등에 대해 향응 접대 및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법원은 정권의 보복조치라고 반발, 영장을 기각했다.
검찰은 이어 당시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 판사 2명과 입회서기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증인검증 출장에서 비행기탑승료·여관비 등 명목으로 9만7000원을 수뢰했다는 혐의였다.
법원은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전국 판사 455명 중 150여명은 “검찰이 기소한 공안사건을 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린 데 대한 정권의 보복조치”라며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판사들에 대한 수사를 중지 시키고 담당 검사를 문책 인사했다. 민복기 대법원장도 판사들에게 사표를 철회할 것을 호소해 판사들의 집단 사표를 막을 수 있었다.
1988년에 일어난 2차 사법파동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발생했다. 6·29 선언, 9차 개헌 등으로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으나 노태우 정부는 전두환 정권에서 활동했던 사법부 수뇌부를 재임명했다.
1988년 2월 335명의 소장판사들은 김용철 대법원장 사퇴와 법관 청와대 파견중지, 유신헌법철폐 등을 요구하는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반발했다. 결국 김 대법원장이 퇴진하면서 일단락됐다.
김명수 신임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이형석 기자 leehs@ |
3차 사법파동은 1993년 6월 김영삼 대통령 시절 발생했다. 민사단독 판사들 40여명이 모여 법관의 독립성 확보를 위한 신분 보장과 법관회의 등 사법부 개혁을 요구했다.
이어 변호사단체와 사법연수생까지 합류하면서 사태가 커지자 김덕주 당시 대법원장이 스스로 물러났다.
4차 사법파동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 일어났다. 박시환 당시 서울지법 북부지원 부장판사가 ‘대법관 제청에 관한 소장 법관들의 의견’을 발표하며 대법관 인선 관행에 항의했다. 이어 우리법연구회 등 진보 성향의 판사들이 대거 가세했다.
김용담 당시 대법관이 예정대로 인선됐으나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가 여성 첫 대법관이 되는 등 대법관 인선 관행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계기가 됐다. 또 전효숙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여성 첫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때문에 최근 사법부의 이슈는 ‘2018년도판 사법파동’이란 평가가 나온다. 한 법조인은 “양승태 등에 대한 진상 규명 등 법원 내부 뿐만 아니라, 변호사·시민단체 등에서도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사법파동에 준할 만한 초유의 사태임은 분명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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