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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 애인 어때요?”…관계대행, 편리함과 씁쓸함 사이

기사등록 : 2018-10-0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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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 인간관계 대행 문화 유행…국내서도 최근 활성화
편리함 가장 큰 장점…단순하고 가벼운 역할 인기
‘관계 맺기 귀찮아’ 인스턴트 만남, 외로운 사회 민낯 지적도

[서울=뉴스핌] 박진범 기자 = #할아버지께서 암 투병 중이십니다. 가끔 휠체어 밀어드리고 산책 같이 해주시고 말동무 해주실 분을 찾습니다.

#제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센스 있게 제 남자친구 역할로 모임에서 즐겁고 편하게 자리할 수 있으신 분을 구해요. 친구랑 같이 논다고 생각하고 오시면 됩니다. 편안하고 건전한 자리니까 부담 없이 연락주세요.

#치맥 같이 해주세요. 제가 먹는 거 그냥 옆에서 구경만 하셔도 됩니다. 식사하신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밥이나 술친구 찾기, 일일 데이트 상대 등을 대신해주는 ‘인간관계 대행 서비스’가 활성화돼 눈길을 끈다. 대부분 일회성 만남에 그쳐 부담이 없고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소통 부족으로 점점 고립돼가는 현대인의 외로운 자화상이라는 지적도 적잖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인간관계 대행 서비스는 10년 전쯤부터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다. 일종의 역할 대행 온라인 플랫폼으로 사이트에 원하는 상대의 조건을 적으면 글을 본 사람들이 지원하는 구조다. 중개 사이트 측에서 미리 등록된 인력 중 알맞은 사람을 알선해주기도 한다. 비용은 조건과 방식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사이트는 거래 과정에서 수수료를 챙긴다.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이런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NHK나 TV도쿄 등 방송사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국내에는 비교적 최근부터 입소문을 탔다. 그간 우리나라 역할 대행서비스는 결혼식 하객이나 장례 조문객 아르바이트, TV프로그램 혹은 강연회 방청객처럼 구인 형태에만 국한됐다. 그나마 애인대행업이 널리 알려지고 본래 역할 대행 성격과도 유사했지만 대부분 불법 성매매 창구로 악용된 사례가 많았다.

그렇지만 한국도 1인 가구 시대가 찾아오면서 새로운 수요가 생겼다. ‘혼밥’ ‘혼술’ 등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편한 사람들이 늘면서 이를 겨냥한 시장이 커졌다. 인간관계도 입맛대로 하자는 이들의 심리를 노린 것이다.

대표적인 역할 대행, 중개 플랫폼인 ‘P사이트’와 ‘S사이트’에는 애인이나 가족, 친구 역할을 찾거나 대신해준다는 글이 넘쳐난다. 비용은 일본처럼 제각각인데 적게는 시간당 3000원~1만원에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이 사이트들은 ‘불건전·불법적인 대행은 불가합니다’고 분명히 못 박으면서 안전성을 강조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다양한 ‘친구’ 역할 대행이다. △코인노래방 같이 가주기 △푸념 들어주기 △밥 같이 먹어주기 △야구 관람 같이하기 △운전면허 시험장 같이 가기 등 상당히 세분화돼있고 구체적이다. 사소한 만남도 가능하다. 실제로 ‘XX동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 한판 하실 분’이라는 글을 올려봤더니 15명이 금방 참여의사를 밝혀왔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런 역할 대행의 장점은 역시 ‘편하다’는 점이다. 연령대도 성별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 일반 익명 커뮤니티에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찾기보단 어느 정도 공인된 곳에서 안전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강점도 있다. 지난해 성탄절 도쿄에서 애인대행 서비스를 이용해본 A(여·30)씨는 “일본은 가격 등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굉장히 편리하고 이색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며 “한국에서도 금요일 밤 술친구 찾기나 취미 공유 서비스 등을 이용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소 씁쓸한 측면도 없지 않다. △대신 사과해주기 △회사에 사표 내주기 △돌아가신 부모님 대역 △친구들 앞에서 애인인척 연기하기 등 ‘이런 것까지 해줘도 되나?’ 싶은 것들도 종종 보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속 인기인처럼 보이게 해주는 'SNS 대행'도 있다. 즐거운 것은 취하고 불편하고 까다로운 인간관계는 남에게 맡겨버리는 세태에 사자성어 '감탄고토'(甘呑苦吐)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이런 세태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 새로운 관계 맺기를 점점 귀찮아하는 심리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사회학 교수는 “사람을 사귀고 알아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싶은 마음"이라며 "우리사회가 타인과 점점 단절되기 쉬워지면서 인간관계에 스트레스 받고 염증을 느끼는 등 위축된 심리를 시장이 파고든 것"이라고 꼬집었다.

beom@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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