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조재완 기자 = 영국과 EU(유럽연합)의 '이혼' 날짜까지 남은 시간은 단 4개월. 시간은 계속 줄어드는데 아직 아일랜드 국경 획정 문제에 발목 잡혀 양측 협상이 끝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아일랜드 백스톱(backstop·안전장치)이 브렉시트 협상의 성패를 좌우하는 사안이 됐을까.
EU와 아일랜드가 헝클어 놓은 데 영국이 말려들어가면서 본질은 사라지고 브렉시트 협상이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도날드 투스크 EU 상임의장 [사진=로이터 뉴스핌] |
브렉시트 협상의 최대 난제로 떠오른 '백스톱'을 처음 언급한 이는 레오 버라드커 아일랜드 총리다. 버라드커 총리는 지난해 12월 아일랜드 하원 연설에서 '노딜(no dea)' 브렉시트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만에 하나 영국과 EU가 무역협상을 이루지 못하고 결별할 경우 과거 민족·종교적 분쟁을 겪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하드보더(Hard Border·국경 통과시 통행·통관 절차를 엄격히 적용하는 것)가 세워지는 것은 막아야한다는 취지였다. 벡스톱안은 노딜 브렉시트 발생 시 아일랜드와 국경을 맞닿은 영국령 북아일랜드를 EU 관세동맹에 남겨두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브렉시트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면서 이제 '백스톱'은 영국이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가장 크게 벌인 '외교 도박'을 압축하는 단어가 돼버렸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결국 "피할 수 없는 큰 충돌"이 벌어졌다고 입을 모았다. 한 EU 브렉시트 협상가는 FT 인터뷰에서 아일랜드 국경 문제를 "영국의 '브렉시트 판타지'가 현실을 마주하는 지점"에 비유했다. 결국 예견된 상황이었다는 지적이다. FT는 이제 심판의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고 전했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국경 획정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젠 이성은 사라지고 감정에만 치우친 설전도 오간다. 연방주의자들은 "피 흘려 세운 레드라인"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식이다. EU와 영국 브렉시트 협상단 모두가 동의하는 점이 있다면 노딜 브렉시트 리스크만 고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각계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노딜 브렉시트 우려에 사람들은 무뎌지다 못해 피로감을 느낄 정도다.
일단 영국이 EU가 제안한 백스톱안을 받아들인 이상 결국에는 EU가 원하는 결론이 나올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 고위 EU관계자는 FT에 "(영국이) 어떻게 백스톱안을 바꿔보려 하든, 결국 EU의 백스톱안에 머무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후의 방책'으로 영국령 전체가 북아일랜드와 함께 EU 관세동맹에 남을 가능성도 있다. EU는 아일랜드와 인접한 북아일랜드만 관세동맹에 남겨둘 것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영국은 영국령 일부만 EU에 남겨둘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북아일랜드의 EU 단독 잔류는 영국의 통합성을 훼손하는 방침이란 것이다. 이 대립에서 더 나아가지 못할 경우 영국령 전체가 EU에 남는 시나리오도 현실이 될 수 있다.
한 EU 고위 외교관은 영국이 백스톱의 기본 원칙을 수용한 것 자체가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지적했다. 백스톱을 둘러싼 우려가 과장됐든 그렇지 않든, 현재로선 브렉시트 과정에서 백스톱이 가장 소모적이며, 값비싼 대가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사이먼 코베니 아일랜드 외무장관은 이제 "백스톱 없이 (영국의) 철수 협정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안전장치에서 시한폭탄으로…백스톱 본질 사라져
당초 아일랜드는 1998년 영국과 어렵사리 체결한 '벨파스트협정(굿프라이데이협정)' 만큼은 지키겠다는 입장이었다. 벨파스트협정이 체결된 후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6개 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고, 영국은 북아일랜드-아일랜드 국경을 허물기로 합의했다. 아일랜드와 영국, EU 간 '장벽없는 교역로'를 지킬 기술적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영국과 아일랜드 정계는 비공식적인 논의를 지속해왔다.
이 때만 해도 미첼 바니에르 EU 브렉시트 수석협상관도 관세 절차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이 같은 혼란스러운 안을 채택하기에는 유럽 법규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벨파스트협정이 별탈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기본적으로 영국과 아일랜드가 모두 EU 회원국이었기에 가능했다. 양국은 벨파스트협정 체결시 국경이나 관세 문제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양국 모두 EU 회원국인만큼 국경선은 사실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거론되지 않았던 문제는 브렉시트로 표면화됐다. 국경을 계속 개방해야 한다면 북아일랜드는 영국과 EU 중 누구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2017년 1월 엔다 케니 전 아일랜드 총리는 기술적 해결책 마련으로 이 문제가 끝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인지했다. 북아일랜드 역시 정치적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영국이 EU 관세동맹과 당일 시장을 떠나도 국경을 아일랜드에는 열어주는 '양립할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하기로 결심한 듯 했다. 아일랜드 정부측 관계자는 "우리 모두에게 '보험 정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아주 분명해졌다"고 설명했다.
케니 천 종리는 이 모든 문제가 브렉시트에서 비롯됐으니 영국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니 전 총리의 후임인 버라드커 현 총리는 더 강경한 입장이다. 이때부터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셔터가 내려졌다"고 영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평했고, 아일랜드 여당 피아나페일의 전 브렉시트 대변인인 스테판 도넬리는 관계가 "더욱 적대적"으로 악화됐다고 말했다. 도넬리 전 대변인은 아일랜드 정부로부터 "영국 관리들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지시가 내려졌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아일랜드는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전략적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였다. 벨파스트 퀸스대학교 교수인 크리스토퍼 맥크루든은 "유럽이나 영국 중 어디에 줄을 설지 택하라는 한 번도 답해본 적 없는 문제에 아일랜드 직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EU 외교관은 이 문제와 관련해 아일랜드가 "영국과 가까이 지내고 싶긴 하나, 우리(EU)와 더 친밀해야하는 쪽을 선택했다"고 평했다.
브렉시트에 있어 아일랜드가 가장 큰 업적은 북아일랜드를 브렉시트 문제의 최전선에 세운 것이라고 FT는 설명했다.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가 진행된 후 북아일랜드 지역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EU 회원국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016년 4월 회원국들은 협상단 대표 바니에르에게 북아일랜드 지역 문제가 브렉시트 협상에서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이로써 아일랜드 정부는 도날드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아일랜드 문제를 '1순위 안건'으로 다루도록 지지를 호소할 동기를 부여받은 셈이다.
여기에 영국은 백스톱안을 EU와의 협상칩으로 이용할 전략으로 채택했고, EU와의 긴밀한 경제 관계를 유지하는 ‘소프트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아일랜드-북아일랜드 간 국경 개방에 적극 찬성했다. EU의 고위 외교관은 FT에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북아일랜드를 무기 삼은 것”이라고 비유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결정은 아직 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EU는 사실상 백스톱으로써 북아일랜드의 경제 및 통상 정책을 잠재적으로 통제하겠다는 약속을 영국에게 요구했다. 영국이 EU와 향후 어떤 미래 관계를 구축하든 이는 브렉시트 조약에 기록으로 상세히 남을 것이다. 본래 의도한 초안과 달리 바뀌어가는 백스톱안에 아일랜드 정부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고 EU 외교관은 설명했다.
연방주의자들은 북아일랜드에 대한 EU의 ‘음모’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메이 총리는 영국령을 분열하는 “이같은 무역 장벽은 어떤 총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한 정치인은 바니에르 EU측 대표가 “북아일랜드에서 제로섬 정치 게임을 시작했다”고 비난했다.
백스톱 협상이 악화일로를 걷자 이제 EU와 영국은 브렉시트 전환 시기를 연장하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메이 총리는 오는 2020년 12월 만료되는 전환 시기를 몇 개월 연장하자고 제안하며 브렉시트 강경파 달래기에 나섰으나, EU와의 완전한 결별을 원하는 ‘하드 브렉시트’파는 전환 종료시점이 명확하지 않다며 반발하고 있다. 여기에 민족주의 성향의 북아일랜드 DUP(민주연합당)는 북아일랜드의 EU 단독 잔류는 영국 시장을 분열하는 처사라며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브렉시트 합의를 목표로 하는 메이 총리로서는 북아일랜드 단독 백스톱안이 필요없을 것이란 입장이다.
이제 EU 협상단은 내분으로 약화된 영국에 주저없이 법적 명확성을 요구하고 있다. EU 측 태도는 마치 노딜 브렉시트나 백스톱이 없는 결과가 발생해도 상관없다는 식이라고 FT는 비판했다. 일부 EU 외교관들이 협상 교착상태를 벗어날 대안을 바라고 있긴 하나, 아일랜드 국경 획정에 관한 논의 비중을 이제와서 축소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이들도 분명 인지하고 있다.
유럽대학연구소의 브리짓 라판 교수는 “이 작은 섬이 (브렉시트) 지지를 잃게 할 것이라고 영국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제 영국이 EU를 떠나면서 백스톱 문제만큼은 명료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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