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장주연 기자 = ‘천의 얼굴’이란 소싯적 그의 별명을 스크린에서 확인하는 순간이다. 전작 ‘범죄도시’(2017)로 전국에 ‘장첸 열풍’을 일으킨 배우 윤계상(40)이 이번에는 조선어학회 대표가 돼 돌아왔다. 잔인, 극악무도, 광기 등으로 설명되던 얼굴은 없다. 민족정신인 말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란 믿는 심지 곧은 독립투사만 있을 뿐.
윤계상의 신작 ‘말모이’가 내달 9일 베일을 벗는다. 엄유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는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1940년대, 까막눈 판수(유해진)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을 만나 사전을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전국의 우리말과 마음까지 모으는 이야기를 담았다. ‘말모이’로 첫 역사 기반 영화에 도전한 윤계상을 지난 20일 뉴스핌이 만났다.
“너무 감동적이고 뜻깊은 작품을 하게 돼서 뿌듯해요. 영화를 보고 출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죠. 사실 할 때는 벅차기도 했거든요.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룬 영화라 힘든 지점이 많았죠. 또 배우로서 연기할 때 모든 걸 사실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고요. 조금만 잘못해도 안될듯한 해서 쉽고 재밌게 다가가지도 못했죠. 물론 결과적으로는 옳은 판단이었지만요.”
윤계상이 열연한 정환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자면 이렇다. 부친의 변절을 부끄러워하는 친일파 인사의 아들.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주시경 선생이 남긴 원고를 기초로 사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에 한글책을 파는 책방을 운영하며 비밀리에 전국의 우리말을 모으는 말모이를 이어간다.
“보통 연기는 자기 안에서 시작되니까 ‘아, 이런 감정이었지?’하고 소통이 돼요. 근데 정환의 깊이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죠. 마치 세 살이 마흔 살의 마음을 표현하는 느낌이었어요. 더욱이 정환은 감정이 드러나는 인물이 아니잖아요. 특히 아버지의 변절을 지켜보는 모습을 표현하기가 너무 힘들었죠. 제 감정을 넣어도 안되고 정환의 감정은 읽어야 하고…. 정말 어마 무시했어요.”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질문에 “4개월 정도는 그냥 그 상태로 있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시간들. 그런 윤계상에게 힘이 돼 준 건 유해진을 비롯한 김홍파(조선생 역), 우현(임동익 역), 김태훈(박훈 역), 김선영(구자영 역) 등 극중 조선어학회를 함께 꾸려가는 배우들이었다.
“함께한 배우 덕을 많이 봤어요. 제 예민한 부분을 많이 이해해주고 돌봐주셨죠. 현장에서도 ‘류 대표’라고 부르면서 제가 감정을 잡을 수 있게 해주셨어요. 너무 감사했죠. 게다가 워낙 연기를 잘하시는 분들이라 저절로 연기가 되기도 했어요. 하루는 현장에 도착하니까 제가 나오지 않는 분량 촬영이 진행중이더라고요. 근데 그 공기 속에 있는 압박, 슬픔이 어마무시했죠. 자동으로 도움을 받았어요.”
소재가 소재다 보니 현장에서도 우리 말을 쓰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했다. 모두 하나 돼 ‘말모이’ 촬영장에서만큼은 외래어를 쓰지 말자고 약속했다. 윤계상은 당시를 회상하며 “정말 깜짝 놀랐다”고 털어놨다.
“현장 용어들이 거의 다 일본어더라고요. 일본어 피하면 또 영어고. 안쓰는 게 진짜 힘들었어요. 그래서 아예 말을 안하는 상황까지 일어났죠. 예를 들면 ‘그거 가져와’, ‘그거 어떻게 할 거야?’ 식의 대화가 오갔어요. 한편으로는 정말 안타까웠어요. 영어를 섞어 쓰면 지식이 많아 보이는 현실 자체가 마음 아팠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부분을 다들 반성하는 계기도 됐으면 해요.”
최근 탄탄대로를 달리는 배우 생활 이야기도 빼질 수 없었다. god 멤버에서 배우로 전향하고 15년. 그간 다양한 장르, 캐릭터를 만났고 몇몇 작품에서는 두각을 나타냈다. 다만 작품성과 연기 호평이 흥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근작인 ‘범죄도시’, 그에 앞서 드라마 ‘굿와이프’(2016)를 연이어 흥행시키면서 윤계상은 ‘흥행 불운아’ 오명을 말끔히 씻어냈다.
“그저 너무 감사해요. 제가 잘나서가 아니란 걸 알아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하고 싶죠.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든 시간이 있었기에 감사함도 더 크고 마음의 여유도 생긴 듯해요. 이제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더 겸손하게 더 열심히 해야죠. 요즘에는 ‘어차피 사는 인생 행복하게 살자, 더 표현하고 살자’는 생각도 자주 해요. 살다 보면 저처럼 힘든 날도 있고 기쁜 날도 있는데 잘 버텨냈으면 좋겠어요, 모두.”
다들 행복하길 바란다는 윤계상은 자신 역시 “요즘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말모이’ 홍보와 함께 god 연말 콘서트 일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정말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편안해 보였다.
“진짜 행복해하면서 준비하고 있어요. 저는 god의 인간성을 사랑해요. 너무너무 착한 사람들이죠. 또 god는 식구들이니까 또 그만의 재미가 있죠. 여전히 저녁 메뉴 같은 말도 안되는 걸로 싸우는데(웃음) 그거 자체가 너무 행복해요. 물론 20년 전에는 상상도 못한 어려움도 있죠. 안무를 까먹는다거나 프롬프트가 없으면 노래를 못 부른다거나 DVD를 찍어야 하는데 대사를 못외워서 다 땅을 보고 있다거나(웃음)…. 근데 그마저도 감사하고 즐거워요. 축복이죠.”
jjy333jjy@newspim.com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