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장주연 기자 = 차기 도지사로 거론될 만큼 존경과 신망이 두터운 사람.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아들이 발목을 잡는다. 음주운전, 그리고 피해자의 사망.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놓이자 아들을 자수시키고 사고를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하지만 사고 현장에서 사라진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돌아갈 방법은 없다. 누구보다 먼저 여자를 찾아야 한다.
배우 한석규(55)가 신작 ‘우상’으로 극장가에 돌아왔다. 20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아들의 실수로 정치 인생 최악의 위기에 몰린 도의원과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했던 피해자의 아버지, 사건 당일 피해자와 함께 있다 자취를 감춘 여자가 빠지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담았다. 한석규는 도의원 구명회를 연기했다.
“2017년 여름에 이수진 감독님 연락이 왔어요. 시나리오는 미리 받았고 그날 처음 만난 거죠. 한껏 기대됐습니다. 전 일단 신인 감독님들을 좋아하고 거기다 ‘한공주’(2014) 감독님이잖아요. 그 작품을 아주 좋아했어요. 답답하면서도 주제가 너무 마음에 들었죠. 이번 ‘우상’ 역시 정곡을 찔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었고요. 이 작품을 제 몸을 통해 관객에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컸죠. 그다음은 투자가 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저 말고도 공감해준 분들이 있었네요(웃음).”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 그에게는 꽤 좋은 충격인 듯했다. 한석규는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했다. 관련 답변이 제법 오랜 시간 이어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전 시나리오를 금방 읽어요. 근데 이건 시간이 걸렸죠. 시나리오 자체만으로도 완성도가 높은 건 ‘초록물고기’(1997)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영화 상영을 안하고 시나리오만 봐도 될 정도였죠. 또 마지막에 엔딩을 읽었을 때 인상이 아주 강력했어요. 물론 영화 역시 글처럼 잘 나왔죠. 저는 평소 주제를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어떤 장르로 하느냐를 생각해요. 같은 작품이라도 장르가 웃음이냐 고통이냐에 따라 달라요. 이번 ‘우상’은 쓴 약 같았죠. 아주 쓰지만 낫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떠나 캐릭터만 놓고 본다면 ‘비겁해서’ 좋았다고 했다. 한석규는 구명회를 두고 여러 차례 “비겁한 캐릭터고 그런 연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초심’과 ‘처음’이란 예상치 못한 단어가 나왔다. 윤복희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던 그때, 몸에 전율이 일던 그때를 뜻했다.
“구명회는 단순히 비겁한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한 거예요. 그런 연기가 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언젠가 ‘내가 연기를 왜 하지’란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엔 연기할 때 주체적으로 뭘 해야 한다는 거에만 정신이 팔렸어요. 그러다 40대에 건강도 한 번 덜커덩하면서 몸도 힘들고 자신감도 없어졌죠. 관둬야 하나 싶더라고요. 연기도 하찮게 느껴졌죠. 근데 또 시간이 지나고 50대가 되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처음, 생전 해보지 못한 경험을 했던 때가 떠오른 거죠. 동시에 연기로 나를 보여주고 있구나, 그럼 연기가 좋아지려면 내가 좋아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침체기를 보냈다지만 사실 관객에게 한석규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훌륭한 배우다.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 그를 바탕으로 펼치는 안정감 있는 연기는 언제나 신뢰감을 줬다. 자신을 향한 칭찬이 쏟아지자 그는 익숙해서라며 자세를 낮췄다.
“연기를 오래 한 사람의 장점은 ‘익숙함’입니다. 같은 시대를 사는 관객과 익숙해지는 거죠. 한 사람을 오래 보면 그 사람의 ‘관(觀)’을 알아요. 어떤 의도,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알게 되죠. 그게 정치인이든 스포츠선수든 마찬가지입니다. 저 같은 경우 연기한 지 25년 됐어요. 그래서 관객들이 저를 알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신뢰가 생기는 거고요. 제가 관객 입장에서 (최)민식이 형의 ‘관’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죠(웃음). 다만 그게 또 때로는 단점이기도 해요. 최고의 장점이자 단점인 셈이죠.”
차기작은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가제)다.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대왕, 그와 뜻을 함께했지만 한순간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다. 이 영화는 한석규와 최민식이 ‘쉬리’(1999) 이후 20년 만에 재회하는 작품으로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다.
“‘천문’을 찍으면서 민식이 형과 나눴던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그저 우리는 진심을 다할 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농사꾼으로 표현해요. 정성을 다해 농사를 지어 쌀을 생산하는 거죠. 우리가 할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만드는 것. ‘우상’도 그런 작품입니다. 처음엔 70회차로 예정된 촬영이 날씨 등 다양한 이유로 100회차 이상 찍었어요. 그만큼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만들었죠. 지금 또다시 생각해보면 안하면 안되는 영화였어요. 새로운 영화가 절실히 필요한 이 시기에 꼭 필요한 한국영화가 아닐까 하네요.”
jjy333jjy@newspim.com [사진=CGV아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