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한때 뮤직 페스티벌의 선두주자였던 록 페스티벌이 자취를 감췄다. 국내에서 탄탄하게 입지를 다지며 3대 공연 중 하나로 손꼽히던 ‘지산 록 페스티벌’은 개최 3일 전 공연을 전면 취소했다. 다른 록 페스티벌들 역시 예전과 같은 명성을 잃은 지 오래다. 이유가 뭘까.
◆ 라인업으로 망가진 페스티벌…록이 설 자리 잃다
국내 뮤직 페스티벌은 7월부터 늦은 9월까지 딱 두 달간이 성수기다. 2006년과 2009년 각각 처음으로 개최된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과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은 국내에서 알아주는 록 페스티벌로 이름을 날렸다.
[사진=인천포트락페스티벌, 지산락페스티벌 홈페이지] |
특히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은 2011년 공연이 열린 사흘간 약 10만명이 찾았고, 2012년 세계 최정상급 록밴드 라디오헤드가 밴드 결성 19년 만에 첫 방한하며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이후에도 두 페스티벌은 노엘 갤러거, 푸 파이터스, 뮤즈, 트레비스, 언더월드 등 거물급 아티스트를 내세우며 팬들을 환호하게 했다.
아쉽지만 록 페스티벌의 명성은 길게 가지 못했다.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경우 개최 3년 만인 2009년 아티스트 섭외를 담당한 옐로우나인과 계약이 종료된 후 라인업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해외 아티스트들의 자리를 국내 밴드로 채우기 시작했다.
여기에 CJ ENM이 주최한 ‘지산 록 페스티벌’과 시기가 겹치면서 그나마 있던 명성도 ‘지산 록 페스티벌’에 빼앗기고 혹평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펜타포트’ 측은 일렉트로닉 뮤직을 주로 하는 이디오테잎과 로맨틱펀치 등으로 반전을 노렸지만, 이미 거물급 뮤지션을 접하며 수준이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기엔 역부족이었다.
나 홀로 명성을 이어가던 ‘안산 록 페스티벌’(페스티벌 부지를 지산에서 안산으로 옮기면서 명칭 변경) 역시 부지 불법 사용, 공연 내 폭행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로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공연의 헤드라이너 역시 록 뮤지션에서 일렉트로닉 뮤지션들로 점차 채워지면서 일각에서는 ‘록 페스티벌로서 노선을 잃었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나름의 방식대로 페스티벌을 이어오던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최악의 사달은 올해 터졌다. 주최‧주관사 디투글로벌컴퍼니는 공연을 사흘 앞둔 지난 7월 23일 “이번 페스티벌은 오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열릴 예정이었으나 공연 개최가 어렵다고 판단, 전면 취소를 결정했다”고 돌연 취소 소식을 밝혔다.
[사진=펜타포트, 지산밸리 페스티벌 홈페이지] |
이어 “제작자들 간 소통의 부재, 타국 콘텐츠에 의존해 캐스팅해야만 하는 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과도한 경쟁으로 더욱 위험한 제작 환경을 조성하고 있었다.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주관사에 업무 능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한다”고 설명했다.
라인업으로 흔들린 록 페스티벌은 또 있다. 바로 부산에서 개최된 ‘부산 인터내셔널 록 페스티벌(부산 록 페스티벌)’이다. ‘부산 록 페스티벌’은 지난해 7월 27~28일 양일간 열린 공연에서 god와 일렉트로닉 그룹 케미컬 브라더스를 헤드라이너로 내세웠다.
록 페스티벌에서 일렉트로닉 그룹을 헤드라이너로 세운 것은 흔히 볼 수 있던 일이지만, 대중음악을 하는 god는 모두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이처럼 공연이 비슷한 시기에 열려 라인업이 분산됐고, 공연 주관사는 헤드라이너급 뮤지션을 데려오기 위해 경쟁을 펼치다 보니, 피해는 오롯이 관객이 입는 상황이 벌어졌다.
◆ 록 대신하는 인디와 힙합…‘상생’하지 못한 결과
록 페스티벌이 라인업으로 인해 망가지기 시작했고, 이를 바라보는 대중 역시 이전과 같지 않은 분위기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록 페스티벌의 빈자리는 인디음악과 힙합이 차지하면서 또 다른 ‘뮤직 페스티벌’ 문화가 만들어졌다.
[사진=그랜드민트페스티벌,그린플러그드 경주 홈페이지] |
현재 국내에서 열리는 뮤직 페스티벌만 10개가 넘는다. 현재 모든 공연에는 록 뮤지션 이름 대신 인디, 힙합 가수들이 올라가 있다. 인디신에서 루키로 떠오르는 그룹부터 힙합신에서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출연을 확정, 많은 팬들이 다양한 페스티벌을 골라 볼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
페스티벌 개최 시기 역시 록 페스티벌과 겹치는 것이 아닌 시간차를 두고 열리면서 뮤지션들도 ‘겹치기 출연’이 아닌, 각 공연에 각기 다른 세트 리스트를 선보일 수 있게 됐다. 인디, 힙합 가수들이 록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다양한 프로그램의 영향도 있다.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인디 음악과 힙합 음악이 선보여지거나, 뮤지션들이 발굴되면서 대중의 수요 또한 급격히 커지게 됐다. 수요가 커지면서 인디, 힙합은 자연스레 국내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반면 록은 점차 대중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한 공연 관계자는 “록 페스티벌은 마니아층이 탄탄해 공연을 주최하면 나름 호황을 누렸다. 국내에서도 입지를 잘 다진 공연이 생겼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록은 비주류 음악이고, 마니아적인 사운드를 많은 대중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 듣지 않는다. 록이 국내에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라인업인데, 국내에서 록을 하는 그룹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얼마 있지도 않은 신인들만 세우는 것도 무리다. 몇 개 있지 않는 공연사는 라인업으로 경쟁을 벌이기 일쑤고, 굵직한 해외 록 가수들을 섭외하자니 비용 부담이 커진다. 그러다보니 새로울 것 없는 라인업이 반복돼 축제가 망가지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결과가 초래됐다"고 아쉬워했다.
이 관계자는 "더군다나 록 페스티벌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열리면서 공연을 준비하는 시기에는 주관사끼리 눈치게임이 벌어졌다. 국내 록 페스티벌이 흥행할 수 있는 여지는 다분했지만, ‘상생’이 아닌 비슷한 시기에 공연을 열어 ‘서로 죽이기’를 택한 게 모두의 잘못”이라고 꼬집었다.
alice0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