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야금(冶金)'은 돌에서 금속을 추출하는 기술입니다. 국민생활과 밀접한 금융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지만, 첫단부터 끝단까지 주목받는 건 몸집이 큰 사안뿐입니다. 야금 기술자가 돌에서 금과 은을 추출하듯 뉴스의 홍수에 휩쓸려 잊혀질 수 있는 의미있는 사건·사고를 되짚어보는 [한국금융의 뒷얘기 야금야금] 코너를 종합뉴스통신 뉴스핌이 선보입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이후 개선된 건 있는지 등 한국금융의 다사다난한 뒷얘기를 매주 금요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서울=뉴스핌] 박미리 기자 = # 2015년 11월 우리은행의 한 지점. 2009년 사망한 A씨 명의로 예금계좌 1건이 개설됐다. 계좌 개설을 신청한 이는 A씨의 가족.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은행이 서류 확인을 소홀히 한 탓이다. 해당 직원은 A씨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 A씨의 생존여부, A씨와 대리인의 가족관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주민등록등본을 건네받고도, A씨의 명의로 A씨의 가족에게 계좌를 개설해줬다.
우리, 기업, 농협, 하나 등 시중은행 5곳은 올 상반기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잇따른 제재조치를 받았다. 2000년 이후 '사망자 명의'로 계좌가 수차례 개설된 사실이 적발됐기 때문이다. 이들이 어긴 법령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제3조 금융실명거래),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제5조2 금융회사 등의 고객 확인의무) 두 가지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은행은 사망자에 계좌를 만들어줘서는 안 된다. 일어나선 안될 일이 일어난 것은 사망자의 대리인과 은행 직원의 탐욕, 부주의가 뒤섞였던 탓이다.
◆ "사망자 명의 계좌, 검사해야" 감사원 주문
금감원은 지난해 감사원의 요구에 따라, 은행을 상대로 '사망자 명의 계좌' 검사를 실시했다. 문제가 있는지 들여다보기로 한 기간은 2000년부터 2016년. 당시 감사원은 행정안전부 전산망에 올라있는 사망자 명단을 기초로 은행의 '사망자 명의 계좌' 현황을 조사한 뒤, 금융당국에 검사 필요성을 전달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당시 은행의 사망자 명의 계좌 수는 237만5000여개(잔액 1747억원)에 달했고, 사망일 이후 개설된 계좌 수도 989개로 적지 않았다.
실제로 금감원이 실시한 검사에선 은행이 사망자에 예금계좌를 개설해준 사례가 줄줄이 나왔다. 대부분은 사망신고를 했음에도, 사망자의 대리인이 가져온 서류를 은행 직원들이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대리인을 통해 계좌가 개설되려면 인감증명서, 위임장, 가족관계증명서(가족관계등록부), 주민등록등본이 제출돼야 한다. 유효기한은 모두 '발급일로부터 3개월 내'다. 하지만 은행 직원 대부분은 발급된지 3개월이 넘거나, 인정되지 않는 서류를 가져온 대리인들에도 계좌를 만들어줬다. 1993년부터 의무화된 금융실명 거래를 위한 고객 확인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금감원은 우리은행 직원 1명에 주의 및 과태료 50만원, 2명에 각각 과태료 100만원과 300만원을 부과했다. 또 농협은행 직원 19명에는 주의·견책·감봉 3개월, 기업은행 직원 1명에 감봉 3개월, 하나은행에는 자율처리 제재조치를 각각 내렸다. 금감원이 금융회사 직원에 내리는 신분상 제재는 자율처리, 주의, 견책, 감봉, 정직, 면직 순으로 수위가 높아진다. 금전 제재는 과징금과 과태료로 나뉘는데, 부과 수준은 사안마다 크게 다르다. 실명법과 특금법(고객확인 의무)은 위반시 과태료가 각각 최고 3000만원이다.
◆ 악용한 고객과 은행원의 유인, '비과세'와 '실적'
그렇다면 대리인들은 왜 굳이 사망자 명의로 예금계좌를 개설했을까. '비과세(非課稅) 혜택' 때문이다. 대개 예금은 이자수익에 15.4%(이자소득세 14%+주민세 1.4%)가 세금으로 붙는다. 3000만원을 연이율 3%인 1년 정기예금에 가입했다면, 1년 후 받는 이자는 90만원이 아닌 76만1400원이다. 반면 비과세 예금은 이자수익에 대한 세금을 면제받기 때문에 이자 90만원을 고스란히 손에 쥘 수 있다. 자격조건은 까다롭다. 만 65세 이상(2019년 기준), 장애인, 독립유공자 등만 가입할 수 있으며, 1인당 최대한도는 전 금융사를 통합해 5000만원이다.
은행 직원들의 소홀했던 서류 확인은 실수도 있었지만, 고의였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고의로 '사망자 계좌'를 개설한 은행 직원들은 '실적 쌓기'를 위해 이 같은 일을 벌였다고 한다. 과거 상당수 은행들은 직원의 핵심성과지표(KPI)에 '예금계좌 개설' 항목을 포함했다. 고객유치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현장에 검사를 나갔던 금감원 관계자는 "한 은행 직원이 돌아가신 할아버지, 친척들의 신분증을 이용해 계좌를 개설했던 사례가 기억난다"며 "모두 실적 때문이었다"고 떠올렸다.
◆ "활성화된 사망자 계좌 7만여개"…지금도 개설 가능할까
결론적으로 지금은 사망자 명의로 계좌가 만들어지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전에는 서류에만 의존해 구멍이 있었지만, 이제는 전산망이 갖춰져있어 확인이 보다 정교해졌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전산으로 실명확인을 거쳐야하기 때문에 사망 여부는 바로 안다"고 전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2014년 '금융기관 신분증 진위확인 서비스'를 도입했다. 행안부, 경찰청 등 정부부처와 은행들 간 전산망을 연결해 본인여부, 사망여부 등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조회할 수 있게 했다. 물론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까지 잡아내긴 어렵다.
사망신고 후에는 사망자가 보유하던 기존계좌도 묶인다. 다만 사망신고 후 은행을 방문해 사망확인서를 내거나, 상속인 금융거래조회 서비스에 접속해 사망자의 전 금융기관 자산에 대해 지급정지 신청을 한 뒤다. 이 절차가 선행되지 않으면 계좌에서 돈은 그대로 오갈 수 있다. 절차가 선행돼도 막히는 것은 '계좌에서 돈이 나가는 것' 뿐이다. 또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기예금 만기 등 생전에 받아야할 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입금거래는 가능하도록 풀어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milpark@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