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홍규 기자 =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석유 전쟁'을 개시하게 된 근본적 원인은 미국 셰일 산업의 영향력 확대에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9일(현지시간) 미국 CNBC방송은 "사우디와 러시아의 공개적인 가격 전쟁은 지난 6일 이후 국제유가의 폭락세를 이끌었다"면서 "이는 미국 에너지 산업을 위축시켜 미국의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의 지위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전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 [사진=로이터 뉴스핌] |
지난 6일 사우디와 러시아가 주도하는 'OPEC+'는 원유 추가감산 합의에 실패했다. 사우디는 코로나19(COVID-19)발 수요 둔화를 우려, 감산량을 기존 하루 180만배럴에서 추가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나 러시아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사우디는 생산량을 늘려 대폭 할인된 가격에 판매할 것이라고 했고, 러시아도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것이라며 증산 방침을 밝혔다. OPEC+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비(非)OPEC 산유국의 연합체다. 사우디는 OPEC을, 러시아는 비OPEC 산유국을 각각 이끌고 있다.
이에 이날 국제유가는 공급 과잉 우려에 24% 이상 폭락했다. 국제유가 기준물인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24.1% 떨어진 배럴당 34.36달러를,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24.6% 빠진 31.13달러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OPEC+가 지난 3년 동안 감산 합의 통해 유가를 지탱해왔지만, 결국에는 미국의 셰일 산업의 배만 불려준 꼴이됐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현재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으로 하루 약 1300만배럴을 생산한다.
러시아도 이런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러시아 최대 원유생산 기업 로즈네프트의 미하일 레온티예프 대변인은 "OPEC+이 감산 합의를 반복해서 연장한 결과, 미국 셰일 오일이 세계 시장을 완전히 신속하게 대체하게 됐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우디의 결정과 관련해 추가 감산 제의를 거부한 러시아에 보복을 가하는 한편, 미국 셰일 산업을 압박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압둘아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 장관과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에너지 장관.[사진=로이터 뉴스핌] 2020.03.07 mj72284@newspim.com |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번 석유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FT는 "러시아는 균형 예산을 달성할 수 있는 원유 가격을 배럴당 42달러로 상정해뒀다"면서 "하지만 최근 수 년동안 석유 수입 초과분을 통해 1700억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조성한 덕분에 러시아는 당분간은 유가 하락기를 버틸 수 있다고 보고있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강경한 입장을 내세운 배경에는 미국의 제재 조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투자은행 RBC의 헬리마 크로프트 글로벌 원자재 전략 부문 책임자는 "OPEC 지도부는 증산에 따른 유가 붕괴가 러시아의 유화적 태도를 유도할 촉매제로 보고 있지만, 러시아는 쉽게 항복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크로프트 책임자는 이어 "우리는 러시아의 전략이 미국 셰일 기업뿐 아니라 미국의 강압적인 제재 정책을 겨냥한 것으로 보고 있다"며 셰일 기업과 제재는 미국의 에너지 생산량을 풍부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노드 스트림2' 건설 작업에 참여하는 기업들에 제재를 부과했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노드 스트림2는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운반하는 송유관을 말한다. 미국의 제재에 러시아 측은 상당히 분노했다.
금융정보업체 IHS마킷의 다니엘 예긴 부회장은 "러시아가 노드 스트림2 완공을 코 앞에 두고 중단하게 된 것은 엄청난 굴욕"이라며 미국은 이 송유관이 러시아의 유럽 내 에너지 시장 지배력을 키워줄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해왔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사우디와 러시아를 겨냥, '국가 행위자들'(state actors)이 원유 시장을 조작하려 한다고 비난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미국 에너지부 샤일린 하인스 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원유 시장을 조작해 (시장에) 충격을 주려는 국가 행위자들의 이러한 시도는 전 세계 파트너와 동맹국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에너지 공급자로서 미국 역할의 중요성을 강화한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 로이터 뉴스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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