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나은경 기자 = "어제 나온 자료와 오늘 브리핑의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구체적인 내용을 좀 더 말씀부탁드립니다."
지난 21일 오후, 과천 정부청사에서 열린 방송통신위원회 브리핑에 참석한 기자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두 시간 뒤 n번방 방지법 개정안 관련 브리핑을 개최하겠다'는 문자를 받고 과천으로 달려왔는데 브리핑 내용은 그 전날 n번방 방지법 통과 후 방통위가 낸 입장자료를 구두로 한번 더 전달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라도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낼까 싶어 20분간 질의응답이 오갔지만 브리핑을 진행한 최성호 방통위 사무처장은 "어제(20일) 통과한 법안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이나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긴 어렵다"고만 했다.
전날 이른바 'n번방 방지법'으로 불리는 전기통신사업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 통과 직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벤처기업협회, 코리아스타트업포럼 3단체는 유감이라며 반대성명을 냈다. 방통위 입장에서는 대응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업계의 반대가 심해지자 청와대가 이를 잘 해결하라며 방통위에 압박을 넣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n번방 방지법이 초스피드로 입법되면서 법을 집행해야할 방통위의 고민이 깊은 듯하다. n번방 방지법의 초안이 된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법안은 지난 4일 처음 발의돼 약 17일만에 입법절차를 밟았다. 국회법에 있는 10일 이상의 입법예고나 과방위 수석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 등의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20대 과방위는 이달 중순까지만해도 총 17개 상설 상임위 중 법안처리율 27% 미만으로 최하위권이었다. 20대 과방위의 법안소위 개최일수는 연 평균 7.25번으로 상임위 평균인 10.3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식물 과방위'라는 오명을 쓰게 된 이유다.
그런 과방위가 지난 6일 임기를 앞두고 주요 법안들을 한꺼번에 법안소위에서 논의했다. 법 규정 중 대부분은 시행령에 위임했다. 한상혁 방통위원장은 "기술적 수준에 따라 계속 범죄행태가 변해 법에 일회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했지만 결국 업계의 의견을 수렴할만한 절대적인 논의 시간이 부족했던 탓이다. 이 때문에 업계는 정부가 불가능한 의무를 부과하지 않을지, 시행령 개정이 잦아 관련비용이 크게 늘지는 않을지 등 걱정이 많다.
지금의 혼란은 결국 20대 과방위가 제 때 제 역할을 하지 못한 탓이 크다. 과방위 소속 변재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7일 "n번방 관련해서는 우선 법을 빨리 통과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추가논의가 필요한 불완전한 법임을 사실상 인정했다. 20대 과방위는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지만 그 책임은 누가 될 지 모르는 새 과방위원들과 집행기관인 방통위, 그리고 인터넷 업계가 짊어지게 됐다.
이번 n번방 사건처럼, 언제나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을 때만 다급하게 움직이는 국회를 가진 국민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21대 국회에선 우왕좌왕하는 정부와 업계가 싸우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일이 없길 바란다. 면피성 입법도, 면피성 브리핑도 이제는 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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