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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주의 수선전도]율곡의 '시무6조'와 조은산의 '시무7조'

기사등록 : 2020-09-0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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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청원에 올라온 진인 조은산 '시무7조' 화제
통치자가 새겨야할 뼈아픈 소리

[편집자]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도봉산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울의 주요 도로와 동네, 궁궐 등 460여개의 지명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수선전도에 있는 지명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오승주의 수선전도'는 이 지도에 나온 동네의 발자취를 따라 지명과 동네에 담긴 역사성과 지리적 의미, 옛사람들의 삶과 숨결 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 숨가쁜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계획입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시무 7조'가 화제다. 먼지같은 사람이라는 뜻의 '진인(塵人) 조은산'이 정부를 비판한 '시무 7조'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리면서 '시무'가 주목받고 있다.

시무(時務)의 사전적 의미는 ▲시급한 일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일이다. 종합하면 '시급하면서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일'이다. 왕조시대에서 시무는 관리들이 왕에게 정책건의를 하는 책문이었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양반은 상소로 시무를 대신했다.

한국사에서 유명한 시무는 몇가지가 있다. 가깝게는 조선 선조시절 율곡 이이가 올린 '시무 6조'다. 고려시대에는 나라의 기틀을 세운 최승로의 '시무28조'가 대표적이다. '시무'라는 의미를 각인케한 것은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의 '시무10조'다.

◆율곡 이이가 진언한 '시무6조'

조선 선조 16년(1583년) 2월1일. 율곡 이이의 시무책(時務策)이 임금에게 건의된다. 내용은 이렇다.

'병조 판서 이이가 입대(入對)하여 시무 6조를 진달했는데, 1.현능(賢能)을 임용할 것 2.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3.재용(財用)을 충족시킬 것 4.번병(藩屛)을 굳건히 할 것 5.전마(戰馬)를 준비할 것 6.교화(敎化)를 밝힐 것이었다.'

이른바 '10만 양병설'의 모태가 되는 이이의 '시무6조'다. 내용은 간단하다. ▲임현능(任賢能) - 어질고 똑똑한 인물을 임용할 것 ▲양군민(養軍民) - 군사와 백성을 양성할 것 ▲족재용(足財用) - 국가 재정을 충족시킬 것 ▲고번병(固藩屛) - 국경을 견고하게 지킬 것 ▲비전마(備戰馬) - 전쟁에 쓸 군마를 준비할 것 ▲명교화(明敎化) - 백성을 가르쳐 좋은 방향으로 나가게 할 것이다.

그런데 선조의 대답이 두루뭉술하다.

'상(임금)이 그 글을 비변사에 내리면서 일렀다. "이 글의 내용을 보니 나라를 위한 정성이 지극하다. 나도 할 말이 있는데, 단적으로 말하면 위로 공경(公卿)에서부터 아래로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뇌물을 주거나 개인적인 일로 청탁하는 행위가 없다면 무위의 정치를 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른바 현능한 자를 임용하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고, 군민을 기르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고, 재용을 충족시키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고, 번병을 굳건히 하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고, 전마를 준비하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고, 교화를 밝히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법이나 아름다운 뜻이라 하더라도 다시 시행될 수가 없을 것이고, 날마다 옛법을 고친다 하더라도 유익함이 없고 헛수고만 하게 될 것이다."'

요약하면 대략 이렇게 해석된다 "다 좋은 말인데, 나도 할 말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한 고위관료와 벼슬을 맡았든 말든 양반 사대부들이 깨끗하면 왕이 걱정없이 정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신하들이 잘하면 시무6조, 이런 것을 올리지 않아도 다 잘 돌아가니 다들 잘 하도록 해라."

선조는 이이의 시무 6조를 '공자님 말씀'으로 듣고,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가운데 양군민(養軍民)과 비전마(備戰馬) 부분이 정치쟁점화되면서 가뜩이나 당시 으르렁거리던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이른바 '10만 양병설'로 대표되는 '양군민(養軍民)과 비전마(備戰馬)'는 동인과 서인의 대립으로 이어지며 결론을 내지 못하다가 9년 뒤인 1592년, 조선은 임진왜란의 참화를 맞게 된다.

율곡 이이의 '시무6조'는 처음 발간된 선조실록에는 없다. 이후 간행된 '선조수정실록' 2월 1일자에 내용이 들어 있다. 선조실록에는 내용이 없고, 선조수정실록에 '시무6조'가 서술된 까닭은 무엇일까. 집권당에 따라 실록 편찬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조선왕들의 실록 가운데 집권당이 바뀌면서 수정이나 개수 등의 꼬리표를 단 임금은 5명이다. 선조(선조 수정)와 광해군(광해군 중초본·정초본), 현종(현종 개수), 숙종(숙종보궐정오), 경종(경종 수정)이다. 당파가 본격화된 선조 이후에 벌어졌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선조 때 시무6조를 건의한 율곡 이이의 모습. 현재 한국은행 5000원권에 사용되는 초상화다. <자료=한국은행 화폐박물관> 2020.09.03 fair77@newspim.com

이이는 서인의 정신적 지주였다. 실록은 선왕 사후 후대왕이 편찬한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이 처음 만들었다. 이후 광해군이 쫒겨난 뒤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했다. 당연히 서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율곡 이이는 북인이 저술한 선조실록에는 거의 무시됐지만, 서인이 주도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비중있게 나온다.

북인이 만든 선조실록에서는 이이의 사망에 대해 '이이가 죽었다'(이이졸·李珥卒)는 단 세글자로만 나온다. 반면 서인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이의 인품과 학문적 성취 등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다.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이이의 시무6조에 대한 선조의 평가가 뜨뜻미지근했던 이유는 당시 집권세력은 유성룡을 비롯한 동인이었다. 선조가 이이의 시무 6조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은 집권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이는 '시무 6조'를 건의한 지 1년만인 선조 17년 음력 1월16일 (1584년) 사망한다. 서인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1월 기사에는 이조판서 이이의 졸기(사망을 알리는 글)가 길게 설명돼 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도 임금에 간언한 '시무 6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아들과 제자들에게 한 것으로 나온다.

'(이이가) 억지로 일어나 입으로 육조(六條)의 방략(方略)을 불러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 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졸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이이는 서울에 집이 없었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우들이 수의와 부의를 거두어 염하여 장례를 치룬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서자 두 사람이 있었다.'

숨을 거둔 장소는 서울 대사동이다. 현재 인사동 초입부근으로 추정된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수선전도에 나타난 율곡 이이가 숨을 거둔 장소로 기록된 한양 대사동. 현재 인사동 초입부근으로 추정된다. 2020.09.03 fair77@newspim.com

◆최승로 시무28조·최치원 시무 10조

이이의 '시무 6조'와 더불어 고려시대 최승로의 '시무 28조'도 한국사에서 시무책의 대표로 꼽힌다. 현재 고려사에 28개조 가운데 22개조만 전해진다.

고려사절요 권2 성종원년 6월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리다'라는 제목의 기사다. 고려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임금의 덕은 오직 그 신하들에게 달려있을 따름이다. 짐이 여러 가지 정무를 새로이 거느리게 되어 혹시 잘못된 정치가 있을까 두렵다.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은 각자 봉사(封事)를 올려 현재 정치의 옳고 그름을 논하도록 하라."고 명한다.

이에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 최승로(崔承老)가 "신이 시급한 일 28조목을 기록하여 장계와 함께 따로 봉하여 올리옵니다."고 상서한다.

현재 전해지는 시무는 ▲국경을 잘 지킬 것 ▲불교에 미혹되지 말 것 ▲호위 군졸을 줄일 것 ▲세세한 작은 일을 하지 말 것 ▲사무역을 금지할 것 ▲절에서 이자놀이 하지 말게 할 것 ▲향리의 토호를 배척하고 관아를 설치해 다스릴 것 ▲요승을 궁궐에서 내쫓을 것 ▲관리의 관복을 정리하고 백성이 입는 옷도 신분에 따라 규제할 것 ▲승려들의 '갑질'을 폐지할 것 ▲중국의 제도를 가려서 따를 것 ▲백성들의 공역(貢役)을 공평하게 할 것 ▲연등회와 팔관회 등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노역을 줄이고 인형을 얼굴에 쓰지 말 것 ▲임금 스스로 겸손할 것 ▲궁중 노비와 마구간 말의 수를 잘 헤아려 결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내보낼 것 ▲백성의 고된 부역을 덜어줄 것 ▲신분에 따라 가옥제도를 준수하고 기준에 맞지 않는 집은 헐게 할 것 ▲화려한 불상을 만들고 거래하는 일을 금지할 것 ▲관리의 등용을 차별없이 공평하게 할 것 ▲반드시 필요한 불법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줄일 것 ▲왕이 별도로 지내는 제사를 없앨 것 ▲신분질서를 바로 잡아 법의 엄중함을 세울 것의 22개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책을 받아 들여 고려의 국가체제 정비를 가속화했다. 중앙정치 기구를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근간으로 2성6부제로 정비했고, 지방에는 관리를 파견해 중앙정책이 지방까지 미치도록 했다.

시무의 기원은 통일신라 시대의 최치원으로 본다. 당나라 유학파지만 통일신라 시대 골품제에 얽매여 6두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최치원은 진성여왕 시절 시무 10조를 올렸다.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최승로의 시무28조가 최치원의 시무 10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분석하고 있다.

상소문 형식으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내용의 이른바 '조은산 시무7조' 청와대 국민청원이 28일 오전 정부 답변 기준인 20만명을 돌파했다.[사진=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따지고 보면 율곡 이이, 최승로, 최치원 등이 올린 시무는 복잡한 내용이 아니다. 왕조사회에서 임금이 해야할 기본을 읊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 귀에 거슬리는 말임은 분명했을 것이다.

'조은산의 시무7조'는 왕조시대 문체를 빌려 현 시대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물론 지금은 왕조시대가 아닌 민주사회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한낱 백성의 장난스러운 치기로 웃고 넘기기엔 통치자가 새겨야 할 뼈아픈 대목이 많다.

fair7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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