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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백발의 투사' 백기완 영면…민주화 운동의 큰 별 지다

기사등록 : 2021-02-1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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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은율 출생, 가정사 비극을 통일운동으로 승화
87년 재야 독자후보 추대...후보 단일화 위해 사퇴
'새내기' '동아리' 등 우리말·민족문화 발전에 큰 기여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진보진영의 큰 별이 졌다. 군사 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의 거두이자 통일운동가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5일 영면에 들었다.

백 소장은 지난해 1월부터 패렴 증상으로 입원, 그동안 치료를 받아오다 병세가 악화돼 이날 오전 4시경 별세했다. 향년 89세.

백 소장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 출생으로 반세기를 넘는 동안 재야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두 번의 대선과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해 한 번은 스스로 후보를 사퇴했고, 나머지 세 번의 도전은 모두 낙선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시대의 밝은 눈임을 부인하지 못했다.

[서울=뉴스핌] 이한결 인턴기자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alwaysame@newspim.com

생명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 시민사회운동에 앞장 서 팔순의 나이를 넘겨서도 한복을 입은 채 거리 시위에 나서는 모습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백 소장은 스스로 자신을 '통일 운동꾼'이라고 칭했다.

이는 가정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백 소장은 해방 이후 여덟 식구 중 아버지와 형, 자신과 여동생 등 다섯 식구는 남으로 내려오고, 어머니와 누님, 할머니 등 세 식구는 북에 남은 이산가족이었다.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에서 그와 형은 군대에 가 북한을 상대로 싸웠고, 전쟁 상황에서 그의 형님이 죽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가정사의 비극은 통일운동을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핵심 과제로 만든 계기였다.

이후 농촌으로 무대를 옮겨 산림녹화와 농촌 계몽운동 등을 전개하다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재야 활동의 길로 들어섰다. 1974년 2월 긴급조치 1호의 첫 위반자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이후 긴급조치 위반 등의 혐의로 몇 번이나 투옥돼 고초를 겪었다.

전두환 정권 때도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는 변하지 않은 거리의 투사였다. 1967년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백범 김구 선생의 통일정신을 이어받은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를 1984년에 통일문제연구소로 개명해 통일 사상 연구와 통일운동을 이어갔다.

진보적 정권 교체에도 관심이 많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야운동권에 독자후보로 추대됐지만, 군부 독재 종식을 위한 야권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면서 스스로 중도 사퇴했다. 

[서울=뉴스핌] 이한결 인턴기자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alwaysame@newspim.com

5년 후인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재야운동권의 독자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의 쓴 잔을 마셨다.  

이후 그는 우리말 살려쓰기와 민족 문화와 민중 문화를 새롭게 찾아 각색하는 일에 힘썼다. 일상생활에서도 순 우리말을 고집하는 그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새내기' '동아리' '달동네' 같이 뿌리내린 말들도 많았다.

민요연구회와 전노협 고문, 반핵평화운동연합 상임고문, 한양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이제 때는 왔다' '젊은 날' '백두산 천지' '아! 나에게도' 등 다수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했다. 그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래 가사 원작인 시 '묏비나리'를 지은 작가인 것은 유명하다.

박근혜 정권 당시 탄핵 관련 집회와 세월호 관련 집회, 이석기 전 의원 구속 반대운동에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참여하는 등 세월에도 변하지 않은 그는 2021년, 그토록 바랬던 통일과 상생의 별로 남았다. 

dedanhi@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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