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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와 맞닿은 한국 현대미학, 시간과 동작을 머금다

기사등록 : 2021-07-0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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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서울 성수동 서울숲의 더페이지 갤러리(대표 성지은)가 추사(秋史)에서부터 현대를 가로지르는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형영(形影), 시방(十方)'이라는 타이틀로 개막한 이 전시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우환, 최명영, 최인수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150여년 전 추사의 글씨와 오늘날 우리 현대미술가들의 회화, 드로잉, 조각이 시대를 건너뛰어 서로 조응하고, 공명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드러내는 특별전이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추사 김정희의 작품 '매화시옥'에 이우환의 회화 '조응', 최인수의 무쇠조각 'At the Edge of Sound'가 어우러진 '형영 시방'전 전경. [사진=더페이지 갤러리] 2021.7.1 art29@newspim.com

전시타이틀 중 '형영'은 형체와 그림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형과 영은 분명 따로이지만 동시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마치 150년 이 땅에서 미술이론가이자 학자, 예술가로 살았던 추사 김정희와, 지금의 작가인 이우환 최명영 최인수의 관계가 바로 형영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아티스트로서 대선배인 추사와 현대의 아티스트들이 작업을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바로 형체와 그림자인 동시에, 넓게 보면 한 덩어리이기도 하다. 또한 전시제목 중 '시방세계'란 불교에서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서남북 사방팔방에, 상하의 열 방향을 아우르는 개념인 이 말은 전세계, 곧 우주를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는 추사의 '매화시옥(梅花詩屋)'이라는 예서 현판과 초서로 된 서간문이 나왔다. 전시를 큐레이팅한 김용대 전 대구시립미술관장은 오래 전부터 추사에 주목해왔다. 추사가 추구한 초월적 세계의 정신성이야말로 '한국 모더니즘 미학'의 시작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추사의 작품 '매화시옥'이 단순히 서예 작품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작품은 완벽한 공간구성과 회화적 조형성을 드러낸 '회화'라는 것이다.

추사의 '매화시옥'은 봄이 찾아왔음을 가장 먼저 알리는 매화를 마주하며 옛 선비들이 시회를 열었던 곳에 걸렸던 현액이다.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는 매화를 찾아 탐매(探梅)여행을 떠났던 선인들의 마음을 담은 추사의 작품을 기획자는 '한자의 의미를 배제한 채 회화적 결구를 이뤄낸 작품'이라고 봤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형과 그 영으로서의 글씨가 하나로 조응하며 이뤄낸 놀라운 시방적 세계라는 것이다.

추사의 작품에 내재된 이 같은 초월적 예술세계에 화답하며 한국미술은 유구한 궤적을 이어왔고, 오늘날 담담하면서도 밀도있는 현대적 조형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게 기획자의 기획논리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최명영의 회화 'Conditional planes', 최인수의 조각 'From a Distant'가 추사 글씨와 어우러진 '형영 시방'전. [사진=더페이지 갤러리] 2021.7.1 art29@newspim.com

이번 전시는 따라서 추사의 인문학적 세계, 시방세계에 닿는 태도에 주목한다. 거기에 더해 이우환, 최명영, 최인수의 정신적 공간을 살펴보는 기획이다. 추사를 중심에 두고, 그의 시방적 세계관을 우산처럼 펼쳐 이우환, 최명영, 최인수 이 세 작가의 작업이 그림자, 곧 영(影)처럼 공명함을 확인해보는 전시인 것이다.

'형영 시방'전에는 추사의 작품 두 점이 중심축을 이루는 가운데, 이우환의 추상작업 '조응'과 최명영의 지문 연작및 종이작업, 최인수의 무쇠및 나무조각이 자리잡았다. 이를 통해 일찍이 추사의 회화적 결구가 이뤄낸 자유롭고도 초월적인 세계가 오늘의 한국미술에 어떻게 흐르고, 어떻게 조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우환의 '조응'은 작가의 '바람' 연작이 변화된 단계로, '바람'시리즈의 회화적 요소가 해체 재구성되며 바둑의 화점처럼 점들이 지긋이 자리잡고 있다. 이번에 출품된 '조응'은 대형 화폭에 네 개의 점만 찍은 그림이다. 그 점들은 너무도 단순해 무심한 듯하지만 아주 예민한 고려를 통해 그 자리에 위치하며 '균형과 파격'을 이룬다. 기획자는 이 작품이 추사의 시방적 결구가 이우환식 평면성으로 환원된 것으로, 미학적 균형과 관계의 세계라고 평한다. 추사가 한 획, 한 획을 더할 때마다 놀라운 '공간의 확장'을 보여주듯 이우환 또한 점을 더할 때마다 화면 속으로 침잠하며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최명영은 이번에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작업한 '지문' 연작을 출품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작가는 캔버스에 구획과 선을 구상한 뒤, 자신의 생각을 물감에 침투시켜 손가락으로 마치 지휘하듯 리드미컬하게 화폭을 채워간다. 매일 매일의 사유와 시간이 캔버스에 씨앗처럼 뿌려지며 무채색의 캔버스에는 음악이 흐른다. 무덤덤한 흰색의 물감덩이들은 멈춘 듯하나 떨림을 머금은 채 에너지와 리듬을 선사한다. 마치 수행에 빠진 듯한 작가의 끝없는 핑거 스트록은 회화적 테크닉을 무화시키며, 의외의 미학을 드러낸다. 이번에 최명영은 한지를 여러 겹 겹쳐 배접한 뒤 먹색 또는 붉은색을 켜켜이 입힌 장엄한 종이작업도 내걸었다.

조각가 최인수는 거대한 무쇠조각을 전시장에 덩그라니 던져놓았다. 추사와 이우환의 작업과 대화하듯 놓여진 그의 검붉은 무쇠덩이는 점토를 한없이 굴리고 굴린 끝에 탄생한 '환원의 조각'이다. 인간의 사유 에너지를 점토에 이입시킨 뒤 그것을 석고로 뜨고, 다시 그 것을 전통기법의 무쇠 조각으로 탄생시킨 작품은 고고학자가 원시의 무덤에서 발굴한 유물처럼 보인다.

김용대 큐레이터는 "최인수의 가로로 누운 무쇠오브제는 추사의 품격과 원시성을 그대로 전달하는 듯하다"고 평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최인수는 느티나무로 만든 수직의 나무조각을 제작했다. 추사의 서간문 옆에 세워진 예각의 날선 조각은 나무의 나이테는 그대로 살린 채 무수한 끌질과 망치질로 거친 표면을 소거한 '뺄셈의 오브제'다.

김용대 전 관장은 "세 작가의 작업은 서양의 미니멀리즘과 겉으론 비슷해 보이나 확연히 다르다. 즉 시간과 동작을 머금고 있으며, 형과 영이 공존하는 것이 차별점이다. 이는 추사의 시방적 세계가 사연을 유지한 채 현대의 개념적 언어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이우환, 최명영, 최인수의 몸과 정신의 융합을 통한 현대미술은 그래서 독자적인 언어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최명영의 한지작업 'Conditional planes'. [사진=더페이지 갤러리] 2021.7.1 art29@newspim.com

이 전시는 10여년 전부터 기획되고 준비됐다. 최신의 트렌드를 쫓는 급하고, 요란스런 전시들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서 보기 드문 전시기획이라 하겠다. 김용대 큐레이터는 지난 2010년 추사의 작품과 현대미술가의 작품을 엮어 '수행(修行)과 시방(十方)'전(공간 퍼플)을 개최한바 있다. 또 2011년에는 대구시립미술관 개관주제전으로 '기(氣)가 차다'라는 전시를 디렉팅하기도 했다. 그리곤 이번에 그 문맥을 잇는 전시를 10년 만에 선보인 것이다.

더페이지 갤러리 또한 큐레이터와 의기투합해 오랫동안 기획을 숙성시켜왔다. 추사 김정희의 '매화시옥'이 지난 2016년 국내 경매에 나오자 전시의 핵심작이라 판단하고, 5천만원에 낙찰받는 등 꾸준히 준비해왔다. 한국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를 가늠해보는 이 독특한 전시는 오는 7월18일까지 계속된다.

art29@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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