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뉴스핌] 정성훈 기자 = '산업재해'의 사전적 정의는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하는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 피해. 부상, 그로 인한 질병·사망, 작업환경의 부실로 인한 직업병 등이 포함'으로 요약된다. 즉 업무 관련성으로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은 경우 산업재해(산재)로 인정될 수 있다.
'일자리정부'를 자청한 문재인정부의 세 번째 구원투수 안경덕 고용노동부 장관. 지난 5월 7일 취임 이후 6개월이 다 되어가지만, 산재와의 '악연'을 끊지 못하고 있다. 잊혀질 만하면 전국 현장 곳곳에서 터지는 대형 산재사고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산재' 공식이 고착화되어 가는 분위기다. 고용노동부가 올해 산재사망자 수를 700명대 초반까지 감축하겠다는 약속은 이미 물 건너간 상황이다.
정성훈 경제부 차장 |
안경덕 장관과 산재와의 악연은 취임 초기 평택항 부두에서 화물 컨테이너 청소 작업 중 300㎏ 무게의 컨테이너 부품에 깔려 숨진 하청 노동자 고(故) 이선호군(23)부터 시작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선호군 사망 사고는 안 장관 취임 이전인 4월 22일 발생했지만, 유가족들이 진상조사를 원해 발인이 약 두 달정도 늦어졌다. 안 장관은 해당 사건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안 장관은 사고 발생 후 약 3주만인 5월 14일 이선호군 빈소가 마련된 경기도 평택시 안중백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빈소를 다녀간 뒤 바로 다음날이다. 안 장관은 조문 이후 유가족과 대책위 면담에서 "사고에 대한 철저한 원인조사 및 책임자에 대한 엄중 처벌"을 약속했다. 또 "해수부 등 관계부처로 구성된 TF를 통해 유사 사고 재발을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안 장관은 이선호군 산재사고를 계기로 산재 사망사고의 획기적 감축을 약속했다. 그는 "청년,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등 어려운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에서 일할 수 있도록 가용한 자원을 모두 동원해 산재 사망사고의 획기적 감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날 이후로 안 장관은 예고 없이 건설현장에 깜짝 등장하는 일이 잦아졌다. '산재예방 전도사'를 자처하고 전국 건설현장에 대한 불시감독에 나선 것이다. 안 장관은 한 중소 건설현장 불시감독 이후 "산재 사망사고 감축을 위해서는 사망사고의 절반을 차지하는 건설업의 안전관리가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지난 6월 4일 열린 '산재 사망사고 위기대응 TF 대책회의'에서는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은 모두 작업중지"한다는 초강수도 뒀다. "근로자 대표, 전문가 등이 안전을 확인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작업중지를 해제하겠다"고 명확한 전제조건도 제시했다.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은 대부분 공사현장 또는 물류창고 등 촌각을 다투는 곳이 대부분이다. 작업중지 지시는 해당 업체에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같은 달 29일에는 정부 직제개편을 통해 '산업안전보건본부'를 신설했다. 고용부 내 산업안전조직을 확대·개편한 것이다. 본부조직 82명과 지방관서 조직 821명을 합쳐 약 900명 체제로 운영된다. 내년 1월 시행 예정인 중대재해처벌법에 대비해 현장의 안전보건관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예방지원을 강화하고, 과로사 등 미래 보건이슈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차원이다. 건설현장 등의 산재사고 예방을 지원하는 기능도 담당한다.
그러는 동안 공사현장 불시검문도 잊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근처 공사현장을 돌며 직접 진두지휘에 나섰다. 고용부 관계자에 따르면 취임 이후 한 달에 한 두번은 공사현장을 방문해 산재를 챙겼다는 후문이다. "취임 이후 현장을 돌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흘러갔다"는 안 장관의 푸념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안 장관의 노력이 무색하게 산재사고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난 6월 10일 광주 재개발 지역 건물붕괴로 9명이 죽고 수십명이 다쳤고, 전국 건설현장에서 이어진 이어진 타워크레인 전복 사고, 추락 사고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며칠 전에는 서울의 한 신축공사 현장에서 화재진압용 약제가 다양으로 누출돼 2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했다. 누군가 고의로 낸 인재(人災)라는 의혹도 제기돼 더욱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최근에는 산재가 정치적 이슈로도 부각되는 분위기다. 최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국감)에서 의원들은 곽상도 무소속(전 국민의힘) 의원 아들이 화천대유에서 퇴직 후 산재 위로금 포함 50억원의 퇴직금을 받은 것을 두고 고용노동부에 진위 여부를 따져 물었다. 안 장관은 의원들의 질의에 "수사당국이 수사 중"이라는 원론적인 답변밖에 할 수 없었다.
내년 1월 시행 예정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은 그동안 업계 중심으로 이어져 온 산재 관행을 뿌리 뽑을 수 있는 시험대다. 안 장관 또한 중대재해법이 산재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편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법에 따르면 안전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원 이하의 벌금을, 법인에는 50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물론 우려의 시각도 있다. 지금껏 산재 사고 시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가 처벌을 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현장소장이 총대를 메고 처벌받거나 법인이 벌금을 무는 수준에 그쳤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벌금 제도를 현재까지 상한선을 두지 말고 매출 대비 부과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기업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금전적 처벌이라는 이유에서다.
어찌됐던 안 장관은 남은 임기 동안 산재와의 지긋한 악연을 끊어내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학창시절 숙제를 잘 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엇보다 관심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안 장관의 산재에 대한 관심이 임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유지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어려워 보였던 숙제도 어느 정도 진척이 되어 있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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