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동훈 기자 = "전쟁이 안나길 바라지만 전쟁이 나면 사실상 러시아와 주변국 사업은 접어야 되겠지요."
러시아-우크라이나간 전쟁 개시 시나리오가 본격화되자 '유라시아'로 불리는 범 독립국가연합(CIS) 건설사업 현장에 나가 있는 우리 건설업계의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다.
일단 현장에 있는 근로자들의 안전문제는 심각하지 않은 상황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파견된 근로자도 적고 최근 전쟁위기가 고조되면서 귀국 인원이 늘고 있어서다.
다만 유라시아 지역 건설수주가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경고하고 있는 만큼 자칫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유라시아' 지역 건설 수주 환경이 크게 악화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서울=뉴스핌] 이동훈 기자 =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등지에서 우리 건설업계가 에너지 플랜트 수주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러시아 가스플랜트] 2022.02.22 donglee@newspim.com |
◆ 우크라이나 근로자 전원 귀국...러시아 현장은 소수만 상주
23일 건설업계와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 진출한 우리 건설업체는 건설사가 아닌 엔지니어링 업체만 3곳이다. 우크라이나에선 주택이나 철도, 교량 같은 SOC사업이 아닌 에너지 플랜트 사업 수주가 대부분이다. 진출한 기업은 도화엔지니어링, 동명기술공단, 동성엔지니어링이다. 이들 업체에서는 모두 6명 정도가 우크라이나 현지에 상주했지만 22일 기준 모두 귀국한 상태다.
국토부 관계자는 "외교부의 우리 국민 보호 방침에 따른 철수 명령으로 모든 기업체 종사 국민들이 철수했다"며 "마지막 남은 1명이 오늘 아침 공항에서 출국함으로써 우크라이나 현지에 남은 업체 근로자들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반면 사업장이 많은 러시아에는 우크라이나 보다 많은 수의 근로자들이 상주하고 있다. 러시아에선 21개 사업장에 대형 건설사 근로자들이 나가 있다. 하지만 이들 인력에 대해선 아직 귀국 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며 건설업계에서도 딱히 선제적인 귀국을 추진할 상황은 아니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안전문제에 별다른 우려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러시아 현장에서 시공에 참여하고 있는 건설사는 현대건설 하나 뿐이며 나머지 DL이앤씨, 현대엔지니어링, 롯데건설, 희림 등은 대부분 설계 과정에 있어 현장에 나간 근로자들은 소수에 머물고 있다.
DL이앤씨 관계자는 "러시아 사업장 업무는 아직 국내에서 대부분을 진행하고 있으며 현장에 나가 있는 소속 근로자는 1~2명 수준"이라며 "사업장도 분쟁지역인 우크라이나 돈바스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러시아 본토에 위치해 있어 안전문제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오덴부르그에서 가스처리시설을 추진하고 있는 현대엔지니어링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현대엔지니어링에 따르면 현장에 나가 있는 근로자는 2명이다. 이 현장 역시 동부 러시아에 위치해 있어 안전문제에는 우려가 없다는 게 회사의 설명이다. 현대엔지니어링 관계자는 "지난해 수주한 사업으로 아직 인력과 물자 투입이 미미해 유사시 사업이 중단되더라도 손해를 크게 입을 상황이 아니다"고 전했다.
이밖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에 간접적인 영향을 받게 될 독립국가연합(CIS) 소속 국가에 진출한 국내 업체들도 '유탄'을 맞았다. 대표적인 곳이 SK에코플랜트가 진출한 카자흐스탄이다. 이들 독립국가연합 소속 국가들은 러시아의 정치, 경제 의존도가 매우 높은데다 지정학적으로도 우크라이나와 가까워 전쟁 발발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SK에코플랜트 관계자는 "국제법상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엄연히 다른만큼 근로자 안전문제를 우려할 상황은 아니다"면서도 "만약 외교부의 권고나 명령이 떨어지면 그에 알맞는 방침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 금융동결 등 서방 경제제재 예상...유라시아시장 철수 위기
이처럼 유라시아 진출 업체 근로자들의 안전문제는 일단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수주 환경 악화에 대해 우려는 커질 전망이다.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을 포함하는 '유라시아' 지역 수주가 이번 사태로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창학 현대엔지니어링 사장(오른쪽)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비소츠크 메탄올 플랜트 기본설계 사업 계약식에서 계약서 서명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현대엔지니어링] |
국내 업계에서 가장 관심을 보이는 것은 서방의 대 러시아 경제제재 여부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경제제재가 이뤄지면 최근 중동, 아시아에 이어 해외 수주 전략지역으로 유라시아를 꼽고 있는 우리 건설업계의 해외수주에 차질이 불가피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서방세계가 러시아에 강도 높은 경제제재인 금융자산 동결을 발동하면 상황은 매우 힘들어진다. 당장 러시아 현장에 나가 있는 국내건설사들이 공사비를 지급받지 못하는 것도 예상할 수 있다. 이 경우 재무제표에서 손실 반영 등으로 건설업체들의 재무상황이 악화될 가능성도 나온다.
해외건설협회 관계자는 "우리 업체들이 나가 있는 러시아 사업장은 모두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 등이 발주한 사업이라 당장 금융동결 조치에 따른 기성 미지급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금융동결조치를 비롯한 경제 제재가 장기화되면 제아무리 러시아라도 힘들어질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건설업계에서는 러시아에 대해 이란이나 북한과 같은 강도높은 경제제재를 무기한으로 시행하긴 어려울 것이란 진단을 내놓고 있다. DL이앤씨 관계자는 "우리 사업장의 경우 아직 시공까지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며 발주처 상황을 볼 때 기성 미지급과 같은 우려는 없다"며 "업계에서는 러시아에 대해 서방의 경제제재가 강도높게 진행되긴 어려울 것으로 예측하고 있어 비관적 전망을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방의 경제제재로 인한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 가치 하락에 따른 환율 리스크는 우려된다. 업계에 따르면 러시아 발주사업은 루블화 지급 조건이 많다. 이렇게 되면 서방의 경제제재로 루블화가 평가절하되고 이는 건설업계의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향후 유라시아 건설수주 환경은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서방 경제제재가 본격화 되면 과거 이란의 경우처럼 서방의 경제제재가 이뤄지면 국내 건설사들도 철수하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란 우려다. 국내 건설사들은 지난 2010년대 초반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하던 이란, 이라크 등에서 전략적인 수주 영업을 펼쳤다. 하지만 이란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대로 대부분 철수한 상태다. 이같은 '유탄'은 러시아보다 카자흐스탄과 같은 유라시아 국가에서 더 심화될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SK에코플랜트 관계자는 "지금으로선 서방의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 수위를 짐작할 수 없지만 강도 높은 제재가 이뤄질 경우 범 유라시아 국가 투자환경이 나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건설업계의 해외수주전략도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기점으로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해외건설협회 관계자는 "협회는 업계와 정부와 함께 우리 건설업계의 수주 확대를 위해 현 상황을 주시하고 분석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dong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