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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크라 사태의 불확실성과 인플레이션

기사등록 : 2022-03-0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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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전 확대…에너지·원자재 천정부지"
"경기침체 우려…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

"제발 외팔이 경제학자를 만났으면 좋겠다."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이 곧잘 했던 투정이다.

경제학자에게 정책에 대한 조언을 구하면 늘 '한편으로는(on one hand)' 긍정적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on the other hand)' 부정적일 수 있다는 답변을 내놨기 때문이다. '외팔이 경제학자는' 오직 한 손밖에 없으니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농담이다.

정민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사진=대외연] 2022.02.23 jsh@newspim.com

이런 퉁명스러운 평가는 경제학자에게 억울한 측면이 있다. 경제학자라고 명쾌한 해답을 내리고 싶지 않겠는가? 경제 정책을 평가하는데 모호한 답변을 늘어놓기 일쑤인 것은 실제 경제 현상의 본원적 복잡성과 그에 따른 예측의 험난함 때문이다.

경제 정책의 효과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개별 경제주체의 변화무쌍한 선호(preference)와 미래에 대한 제각각의 기대(expectation)와 상호작용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경제학자를 더욱 곤란하게 하는 것은 현실에서 언제라도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이다. 그 누가 1914년 6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돌연 암살당해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리라 예측했겠는가? 그 누가 대호황을 누리던 1929년 미국의 어느 화요일에 주가가 폭락하여 미국 GDP의 30% 이상이 증발할 것을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경제학자가 원치 않게 우유부단한 것은 우리 경제에 내재한 본원적 돌발성에 있을지도 모른다. 약삭빠른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돌발 변수에 '외생적 충격(exogenous shock)'이라는 알쏭달쏭한 이름을 붙이고 본격적인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곤 하지만, 여전히 경제 정책의 효과를 예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학자를 괴롭히는 가장 최근의 돌발 변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전쟁을 예측한 전문가는 서방뿐 아니라 러시아 현지에도 많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강대국의 첨예한 갈등이 예상치 못한 물리적 충돌이라는 안타까운 결말로 귀결되었지만, 우리 앞에 놓인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추가적인 물리적 충돌 가능성은? 다른 나라로의 확전 가능성은? 외교적 협상으로 갈등이 일시에 봉합될 가능성은? 이러한 모든 가능성은 원자재 수급 차질로 인한 가격 변동에서부터 국제 금융시장 교란, 실물 경제 타격에까지 경제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환원된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전면전으로 치닫기 전, 미국 정부가 올해는 예년보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주장하는 외팔이 경제학자가 여럿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달러를 시장에 거침없이 뿌려댔던 상황에서, 2020년 이후 코로나 사태 대응을 위해 정부가 원 없이 지갑을 열었기 때문이다. 2020년 미국 재정적자는 3조 1천억 달러에 달했다. 1945년 이후 역대 최고치다. 2021년 재정적자는 2조 8천억 달러에 달한다. 역대 두 번째에 해당한다. 이제는 지갑을 다시 닫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에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소비자물가지수와 끝도 없이 빨간 불을 켜대는 주식 시황판은 시장에 유동성이 과잉 공급되었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닫기 전인 지난 2월, 제임스 불라드(James Bullard) 세인트루이스 연은 총재는 만성화되어가는 인플레이션 문제를 잡기 위해 상반기 기준 금리 1%p 인상이라는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미국 정부가 지난해보다 씀씀이를 확 줄이고 금리를 높게 끌어올리는 것이 적절한 상황으로 보였다. 경제학자 대부분이 외팔이가 될 수도 있던 모처럼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전면전으로 결론 나면서 모든 것이 복잡해졌다. 당장 원자재 수급이 어려워졌다. 아직 공급량이 줄어들지도 않은 원유와 천연가스는 앞으로의 공급 감소를 합리적으로 예측한 시장 참여자들의 수요 증가 때문에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러 에너지 제재가 발표되기라도 하면 공급 감소가 현실화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에너지 가격이 지금보다 훨씬 더 올라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미국이 화석연료를 수입하는 처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인한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파고를 쉽사리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장 화석연료 가격이 급등하면 거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덩달아 올라가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미국 경제의 고질적인 인플레이션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은 자명하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인플레이션 완화 측면에서 고강도의 금리 인상이 절실하다.

그러나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인한 내수 위축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여기에 가뜩이나 대러 금융제재로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자산 가격이 급락하기라도 하면 자본 시장 충격이 실물 부문으로 파급되어 경제가 더욱 침체할 가능성도 상존한다. 상승하는 시간당 임금과 4% 아래로 떨어진 실업률 수치만 보면 지금 당장은 미국 노동시장이 괜찮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예상보다 강력한 공급 충격이 도래하면 투자와 고용은 언제라도 쪼그라들 수 있다. 물가는 올라가는데 생산이 줄어드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부가 쉽사리 허리띠를 졸라매기도, 금리 인상이라는 회초리를 들기도 모호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국이 기준 금리를 인상하기 어려워졌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반대 시나리오가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이 짙게 드리워지면 가계와 기업은 소비와 투자를 대거 유예하기 마련이다. 수요 감소가 공급 감소를 넘어서면 물가는 하락한다. '디플레이션(deflation)' 현상도 완전히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바야흐로 '불확실성의 시대'다.

경제 현상의 기저에 자리한 본원적 변화무쌍함과 경제주체의 다양한 기대는 경제학자를 늘 괴롭힌다. 여기에 현실에 엄존하는 불확실성은 경제학자를 더욱 힘들게 한다. 모처럼 경제학자를 외팔이로 만들 수 있었던 단차원 방정식의 경제 여건이 우크라이나 사태라는 돌발 변수(variable)가 더해지면서 풀기 난망한 다차원 방정식이 되었다. 그래서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의 불만 어린 투정은 당분간 유효하다. 아니, 외팔이 경제학자를 찾는 건 그때보다 더 어려워졌다.

◇ 정민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약력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경제학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러시아유라시아팀 부연구위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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