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뉴스핌] 권지언 특파원 =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빠르게 열세로 돌아서고 있는 러시아가 경제, 정치 등 다방면에서 벼랑 끝으로 몰리는 모양새다.
그간 고유가 등에 힘입어 예상 외로 잘 버틴다는 평가가 나온 러시아였지만 본격화되는 서방국 제재 충격 속에 경제가 점차 쇠퇴하는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선택지도 빠르게 줄고 있다.
◆ 수세 몰리는 러, "역전 불가능" 회의론 고조
우크라이나군은 이달 들어 남부와 북동부 지역에서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진행했다. 특히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의 군수 집결지이자 전략 요충지인 이지움 수복에 성공하는 등 성과를 거뒀고, 러시아군은 하르키우주를 사실상 포기하고 퇴각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각) 하르키우주의 전략 요충지인 이지움을 전격 방문해 "우리는 승리할 때까지 오직 전진할 것"이라며 러시아의 침공으로 빼앗긴 영토를 모두 되찾아 해방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번 달에 시작된 러시아군에 대한 반격 작전으로 동부와 남부지역에서 6000㎢에 이르는 영토를 수복했다고 밝혔다.
[이지움 로이터=뉴스핌]김근철 기자=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4일(현지시간) 러시아군으로부터 탈환한 전략 요충지 이지움을 전격 방문, 군인들과 함께 국기 게양식을 하고있다. 2022.09.15 kckim100@newspim.com |
러시아는 하르키우 지역에서 병력을 뺀 것을 인정하면서도 "계획된 병력 재배치"라며 후퇴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진격에 러시아 내부에서조차 전쟁 승리가 물 건너 갔다는 회의론이 고조되고 있다.
보리스 나데즈딘 러시아 시의원은 지난 9일 관영 NTV의 정치 토크쇼에서 "지금 우리가 싸우는 방식으로는 우크라이나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며 평화 협상 필요성을 강조했고, 러시아 정치학자 비탈리 트레티야코프 모스크바주립대 교수 역시 "우리 군이 지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이 알게 되면 전쟁에 관한 충족되지 않은 기대 때문에 사회적 격변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가디언은 푸틴 대통령의 사임 요구도 커지고 있다면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18개구 대표들이 푸틴이 물러나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에 서명했다고 전했다.
경제적으로도 러시아는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러시아 재무부 내부 문건을 입수, 러시아가 서방국 제재로 수천억 달러의 직접 손실을 보는 중이라고 보도했다.
통신은 지난달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 공유된 해당 문건에는 러시아 증시 충격과 제재로 인해 동결된 3000억달러 외환보유액, 은행 자본 피해 등을 비롯한 손실 내용이 담겼고, 금융 시스템에 관련한 피해액만 집계됐을 뿐 전반적 경제 충격은 그보다 더 심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CNN 역시 러시아가 지금 당장은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앞으로는 서서히 쇠퇴기로 접어들 것이라 진단하기도 했다.
◆ 줄어드는 선택지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에 굴욕적 반격을 당하고 있는 러시아에 남은 옵션이 많지 않으며, 대부분이 사용하기 쉽지 않은 옵션들이라고 입을 모은다.
첫째로 거론되는 옵션은 러시아가 군을 재정비해 우크라이나에 반격을 가하는 것인데, 인력을 충원하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세르게이 마르코프 러시아 정치연구소 소장은 "현재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인력 부족"이라면서 "우크라이나에서 싸우고 있는 러시아 군인 수는 우크라이나 군의 절반에 그친다"고 말했다.
폴란드 정보분석업체 로찬 컨설팅의 콘라트 무지카 국장은 러시아 의용부대 힘이 약해지고 있으며, 모병 캠페인으로 기대했던 인력 보충을 못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모병 인원이 더 줄어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면서 러시아군이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선 동원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크렘린궁은 계속해서 총동원령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는데, 총동원령을 선택한다 해도 국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힐 확률이 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7차 동방경제포럼'에서 발언하고 있다. Sputnik/Sergey Bobylev/Pool 2022.09.07 [사진=로이터 뉴스핌] |
푸틴 대통령이 이미 경고했듯 유럽에 대한 에너지 공급 중단과 식량 수출 봉쇄 등으로 간접적 위협을 지속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위협 만으로는 이미 힘을 키울대로 키운 우크라이나의 무릎을 꿇릴 수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는 물론 종전 협상이지만 이 역시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날 푸틴과 직접 통화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전쟁을 종식할 평화협정을 기대하기 어렵다면서 "종전까지는 멀었다"고 언급했다. 이어 그는 "휴전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 '사면초가' 푸틴, 핵카드 꺼낼까
강력한 카리스마와 공포 리더십으로 20년 넘게 러시아를 통치했던 푸틴에게 점차 불리한 상황이 만들어지자 그가 결국은 핵카드를 꺼내 들 것이란 우려도 고조되고 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이달 초 "옛 소련연방 해체 후 우리는 전략적 핵 무기를 잘 보존해 왔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로즈 가테모엘러 카네기재단 러시아담당 연구원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진짜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에 반격할까 우려스럽다"면서 "대량살상무기가 사용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 사용이 아닌 전술핵무기 사용이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하버드대 벨퍼 과학국제문제연구소 소속 케빈 라이언 선임연구원은 푸틴 대통령이 뭔가 극단적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코너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을 우려했다.
실제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전날 "군사 행동이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코노미스트지 역시 푸틴이 스스로 체제 위협을 느낀다면 핵카드를 꺼낼 수 있다면서, 다만 그에 따른 리스크는 엄청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로버트 오르퉁 조지워싱턴대 국제학 교수는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현 상황에서 전술핵을 쓸 것 같지는 않다"면서 "이를 이용해 위협은 하겠지만 실제로 사용했을 때 감당해야 할 결과가 엄청난 것을 알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전쟁연구소(ISW)의 연구원인 조지 바로스는 러시아가 전술핵을 쓰려면 그에 적절한 군대가 필요한데 현재 러시아 군대는 사기가 너무 떨어져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kwonjiu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