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러시아가 2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흑해 곡물수출 협정 이행을 돌연 중단한다고 선언하면서 세계 식량 가격이 다시 치솟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곡물수출 협정 이행을 "무기한 중단한다"고 밝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 7월 22일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흑해에서 우크라 곡물 수출 안전 통로를 마련하고 오는 11월 19일까지 곡물 수출로 유지에 합의했었다.
러시아가 돌연 협정 이행을 중단한 것은 우크라의 드론 공격 때문이다. 러 국방부는 "우크라 정권이 러시아 흑해함대와 민간 선박에 저지른 테러 행위를 고려해 러시아 측은 우크라 항구에서의 수출 협정 참여를 중단한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 남부 오데사항에 있는 화물선. 2022.08.19 [사진=로이터 뉴스핌] |
앞서 이날 러시아 정부의 미하일 라즈보자예프 세바스토폴 시장은 우크라군 드론 16대가 도시 연안 인근의 흑해함대에 드론 공격을 해왔고, 러시아 군함이 적군을 퇴각시켰다고 알렸다. 세바스토폴은 러시아가 지난 2014년 우크라로부터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의 최대 도시이자 러시아 함대가 주둔한 곳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영국 해군이 우크라에 드론 공격 계획을 설계해줬으며, 지난달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폭파 사건에도 영국 해군이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러 국방부는 영국을 배후로 지목하게 된 배경이나 근거를 제시하진 않았다.
러시아는 자국의 민간 선박들의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 무기한 협정 이행을 중단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공격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프랑스 외교부는 "영국에 대한 드론 공격 의혹 제기는 실질적인 증거가 없고 근거도 없다"고 비판했다.
서방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 대통령이 다시 한 번 식량을 무기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 외교부 장관은 러시아가 곡물 수출로에서 무려 220㎞ 떨어진 지점에서 발생한 폭발을 억지스러운 빌미로 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외원조 실시기관 국제개발처(USAID)의 사만다 파워 처장은 "세계는 푸틴이 계속해서 식량을 전쟁의 무기로 활용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유엔,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는 러시아가 즉각 협정을 준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아직은 러시아가 입장을 선회할 징후가 보이지 않다.
◆ 흑해 곡물 화물선 218척 발묶여...밀 가격 5.5% 급등
협정은 우크라 남부 오데사 등 항구 3곳에서의 안전한 양국 곡물과 농산물 수출을 보장한다. 유엔·튀르키예·우크라이나·러시아 등 4개국 대표로 구성된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 소재의 공동조정센터(JCC)가 선박의 이동과 검문·검색을 담당한다.
우크라 기반시설부에 따르면 러시아의 협정 이행 중단 통보 이후 발이 묶인 선박은 218척이다. 29일 이후 통로를 항해한 선박은 없다. 유엔은 러시아의 참여 없이도 31일 예정된 출항 선박 12척, 입항 선박 4척의 이동을 허가하기로 우크라, 튀르키예와 합의했다. 유엔은 JCC 러시아 대표에 해당 사실을 통보했다.
러시아는 아직 이에 대한 입장을 내놓지 않은 상태다. 러시아가 협정 이행을 중단했기 때문이 31일 선박 이동의 안전보장은 불안하기만 하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즈구리우카 마을의 소맥 밭. 2022.08.09 [사진=로이터 뉴스핌] |
이에 글로벌 곡물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한국시간으로 31일 오후 3시 기준 시카고선물거래소(CBOT)의 소맥(밀) 선물 가격은 부셸당 8.74 달러로 전거래일 대비 5.46% 급등한 가격에 거래됐다. 밀 가격은 장중 한 때 8.93달러까지 치솟아 지난 14일 이래 최고치를 호가했다.
옥수수 가격은 2.24% 상승한 6.96달러, 귀리는 4.23% 오른 3.82달러, 대두는 0.75% 상승한 14.11달러 등 기타 곡물 가격도 강세다. 가축 사료로 쓰이는 대두박도 0.68% 상승한 4.28달러에 거래 중이다.
우크라산 해바라기씨유 수출길이 막힐 것이란 관측에 이날 말레이시아산 팜유 가격도 4% 급등했다.
우크라와 러시아를 비롯한 흑해 주변 지역은 '세계의 빵바구니'로 불릴 만큼 곡물 생산 허브(hub·중심지)다. 두 국가가 세계 밀 수출에 차지하는 비중은 30%. 우크라 단독으로만 전 세계 약 12%의 곡물 수출을 담당한다.
우크라 곡물수출협회에 따르면 러시아가 우크라를 침공한 올해 2월 전 월 최대 곡물 수출 규모는 600만톤(t). 지난 3월 곡물 수출 규모는 월 30만t으로 급감했다가 지난 7월 곡물 수출 협정 체결 이래 약 3개월 동안 950만t이 흑해 항구에서 출항했다.
시장 트레이더들은 이날 곡물 가격 상승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싱가포르 소재 트레이더들은 로이터통신에 "추후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 지켜봐야겠지만 우크라가 계속해서 곡물을 실어 나를 수 있을지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호주 시드니 소재의 애널리스트는 "통상적으로 상승한 국제 곡물 가격이 공급망을 거쳐 소비자 가격에 영향을 주는 데 2개월 정도 걸린다"며 국제 식량 가격 상승의 여파가 내년 들어 본격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렸다.
동영상 연설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2022.10.29 [사진=우크라 대통령실 제공] |
◆ 젤렌스키 "푸틴, 의도적으로 세계 굶길 속셈"
푸틴이 다시 한 번 식량 무기화 카드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은 30일 밤 연설에서 러시아의 협정 이행 중단이 "계획적"이고 "다소 예상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가 오늘 내린 결정이 아니다. 러시아는 지난달부터 의도적으로 세계 식량 위기를 악화시키기 시작했다"며 "계획적으로 세계 여러 대륙을 굶길 작정인 러시아가 주요 20개국(G20)인 것이 말이 되느냐. 러시아는 20개국에 있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푸틴의 이른바 '기아 계획'은 우크라를 지원하는 서방을 압박하기 위한 전략이란 전문가의 진단이 나온다. 동유럽 역사 전문가인 티모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러시아가 흑해 수출로를 차단했던 지난 6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러시아·우크라 곡물 수입 의존도가 큰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중동 국가들에서 폭동과 대규모 난민이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수만명의 북아프리카와 중동 난민들이 유럽으로 향한다면 그동안 철옹성 같았던 우크라 지원 여론이 흔들릴 것이란 계산이다.
스나이더는 "세계에서 식량부족으로 폭동이 일어난다면 러시아는 우크라를 탓하는 선전을 할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 내 점령 지역을 자국 영토로 인정받고 경제 제재의 전면 철회를 요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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