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뉴스핌] 정성훈 기자 = 최근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신분을 밝히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다. "우리 기업명이 왜 나간거죠?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A기업, B기업으로 표시하지 않나요?"
알고 보니 모 기업에서 하청 근로자 1명이 추락해 사망한 사건을 기사화했더니, 이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전화였다. 일부 홍보팀 직원의 무지성 발언일 수도 있지만, 중대재해를 대하는 기업들의 태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성훈 경제부 차장 |
고용노동부 출입기자들은 기업 내(공사규모 50억원 이상·상시근로자 50인 이상) 중대재해 발생 시 이에 대한 사실을 문자로 공지받는다. 공지 내용에는 기업명뿐만 아니라 중대재해 발생 시간, 사망 경위, 정부 대응 등이 포함돼 있다. 기자는 이에 대한 내용을 기사화해 중대재해의 위험성을 고지시킬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중대재해 발생시 기업명이 나가면 이를 빼달라는 요구도 끊이질 않는다. '소나기는 우선 피하고 보자'는 식의 안일한 대응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중대재해 사고가 한 번 발생한 기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사고가 반복된다. 그럼 또 다시 홍보팀과 기자 간의 무의미한 실랑이가 반복된다.
외국인력 확대에 따른 '위험의 외주화'도 기업들이 중대재해를 가볍게 여기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지난달 기준 고용허가제(E9, H2)로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온 외국인 인력은 20만명에 달한다. 이 중 90% 가량이 금속가공·식료품·조선업 등 제조업에 집중돼 있다.
험한 일에 종사하다 보니 중대재해 사고도 많이 발생한다. 고용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중대재해 사고사망자 874명 중 외국인은 85명으로 9.7%에 이른다. 올해 상반기는 중대재해 사고사망자 392명 중 42명(10.7%)이 외국인으로, 그 비중이 더욱 늘었다. 지난해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발생한 중대재해 사망자 1266명 중 외국인은 127명으로, 10명 중 1명은 외국인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최근에는 외국인 사망자 비중이 더욱 급격히 늘고 있다. 비공식 통계이긴 하지만 지난 7월부터 10월 12일 현재 고용부에서 문자로 공지한 중대재해 사망자는 총 59명(58건)으로, 이 중 외국인은 9명에 달한다. 비중을 따져보면 18%까지 상승했다. 중대재해 사고사망자 5명 중 1명은 외국인으로 보면 된다.
특히 외국인들은 제조업 공장 또는 건설현장에서 주로 추락사·끼임사 등으로 목숨을 잃는다. 바꿔 말하면 죽지 않아도 되는 외국인 근로자가 순간의 부주의로 가족과 생이별을 맞이하는 것이다.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기업 투자는 '말뿐인 허울'에 그친다. 대표적으로 SPC 그룹은 지난해 중대재해 사고 이후 1000억원 안전경영에 투자한다고 했지만, 올해에만 벌써 여러 차례 끼임사고가 발생했다. 실제 안전을 위한 기업 투자가 이뤄졌는지 정부가 확인할 방법도 없다. 기업을 견제할 수 있는 기능이 사실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장에서는 누구의 엄마·아빠, 누구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현장 근로자들이 중대재해로 목숨을 잃는다. 제조업 인력난, 기피현상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해법은 중대재해를 대하는 기업의 안일한 대처와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CEO가 적극적으로 나서 중대재해의 경각심을 일깨워 줘야 한다. '나몰라라'식 대응은 장기적으로 기업 브랜드를 깍아 먹는 원흉이 될 수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다.
jsh@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