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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에 '구멍'을 낸 이슬기..누비이불·현판 '예술'이 되다

기사등록 : 2024-07-2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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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오브제나 대상,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에서 슬쩍 빗겨나 '언어와 기호' 사이 원초적 움직임에 주목한 작업
-갤러리현대 신관서 8월 4일까지 '삼삼'전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서울과 프랑스 파리를 오가며 작업하는 작가 이슬기(52)가 모처럼 고국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전시 타이틀은 '삼삼'이다. '삼삼하다'라는 말은 '사물이나 사람의 생김새나 됨됨이가 '마음이 끌리듯' 그럴듯 하다'라는 뜻이다. '삼삼'이란 단어를 전시 제목에 쓴 것은 작가에겐 주위서 맞닥뜨리는 많은 것들이 삼삼하고, 재미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가는 1시간여 함께 한 전시설명회 중에도 "재미있다"라는 감탄을 자주 되뇌었다.

[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 자신의 작품을 들고 포즈를 취한 작가 이슬기. 들고 있는 것은 종이죽으로 만든 탈 작품 'K(계란코)'다. [사진=갤러리현대] 2024.07.18 art29@newspim.com

지난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상 최종수상자로 선정된 이슬기는 독창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민속적인 요소와 일상의 사물이나 언어를 작업에 솜씨좋게 녹여왔다. 기하학적 패턴과 선명한 색채로 민속과 일상사물, 언어 등을 엮어내고 표현한 조각과 설치작업을 선보여온 것. 한국의 단청이나 누비 장인(匠人)들과 협업해 전통기술을 현대미술 속에 슬그머니 녹여낸 것도 일련의 작업 중 하나다.

이슬기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지난 2018년 '다마스스(DAMASESE)'라는 타이틀로 갤러리현대에서 가진 전시 이후 6년 만이다. 이번 '삼삼'전은 이슬기 작가가 한국에 몇개월 간 체류하며 고안해낸 '현판프로젝트'를 필두로, 그간 꾸준히 시도해온 '이불프로젝트: U'의 새로운 이불작품과 대규모 설치작업을 재편성한 '느린 물', 갤러리현대 전층을 가로지르는 '모시 단청' 벽화작업 안에 설치된 '쿤다리', 'K', '바가텔' 등 30여 점이 나왔다.

 

[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진주명주 장인, 통영 누비장인과 협업한 이슬기의 이불 프로젝트 작품. 왼쪽부터 'U:트집잡다', 'U:부아가 나다'. [사진=갤러리현대] 2024.07.18 art29@newspim.com

이번 서울 전시의 주요한 키워드로 이슬기는 '구멍'을 내세웠다. 작가는 "갤러리에 구멍을 내서 전시장에 빛이 스며들게 하면 어떨까 상상했어요. 구멍을 뚫으면 '쿵' 소리가 나겠죠. 그 소리를 담았습니다"라고 밝혔다. 작가는 가상의 구멍을 통해 화이트큐브의 갤러리에 노을빛이 스며드는 모습을 생각하며 전시를 짰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구멍'은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문이 만드는 밖과 안을 연결하는 큰 구멍부터 나무문살의 격자 모양에서 은은하게 형성되는 작은 구멍, 전시장 벽면에 직조된 모시단청 사이사이의 구멍을 총칭한다.

전시장 벽면 여기저기에 도색된 살구색 또한 노을빛을 화이트 큐브로 전달하는 '구멍' 역할을 한다. 나아가 이 '구멍'은 안과 밖의 이분법을 지우고, 한쪽 방향으로 흐르는 보편적 인식과 감각의 관습을 뒤집어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작가의 예술적 실험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현대미술에 이슬기 식 '구멍'을 내고자 한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소개되는 신작 '현판프로젝트'는 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덕수궁 대한문 현판을 바라보다가 나온 작품이다. 그날 현판이 느닷없이 달라보였고, 결국엔 '우리가 있는 곳, 들고 나는 곳, 그 문을 가르는 나만의 현판을 만들어 보자'는 마음을 먹게 했다. 소나무판을 구해 이슬기는 '태초의 단어', 의성어·의태어를 새겼다. "한글 의성어는 유난히 그래픽적이라 더 흥미롭게 작업할 수 있었다"는 작가는 사람만큼 큰 나무판에 중요한 이름을 새겼던 현판을 엉뚱하게 반전시켰다. 

[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이슬기 작 '쿵쿵'. 홍송(붉은 소나무판)에 '쿵쿵' 두 글자를 겹쳐 새긴 작품이다. [사진=갤러리현대] 2024.07.18 art29@newspim.com

통영의 누비 장인과 협업한 '이불 프로젝트:U'도 눈길을 잡아끈다. 1980년대까지 지천에서 만날 수 있었던 현란한 색상의 누비이불, 프랑스 친구들도 좋아할 듯싶어 선물하려 찾아다녔지만 "유행이 지나 더이상 안 나온다"는 말에 10년 전부터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태어나고, 자고, 죽고, 사랑하고…. 이불 밑에서 벌어지는 일이 참 많잖아요. 너무도 개인적인 이 물건에 '속담'이라는 공동체의 유산을 감춰두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새하얀 진주명주를 한줄 한줄 정성껏 누빈 이불은 그 자체로도 곱디 곱지만 거기 담긴 속담을 유추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모시 단청'은 갤러리현대의 3개 층을 가로지르는 벽화다. 단청장인과 협업해 '긋기단청'이라는 전통기법을 사용해 제작했다. 직물의 씨줄 날줄을 연상시키는 가로와 세로선이 조화롭게 엮인 작품으로, 전시장을 오르내리며 감상하다 보면 지하, 1층, 2층 작업들이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이슬기의 이번 '삼삼'전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나 분류로 규정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편의에 의해 구분하며 단정짓는 작금의 사회에서, 이슬기가 펼쳐놓은 작품들은 흥미로운 '구멍'으로서 우리의 고여있는 인식과 감각을 일깨워준다. 독립큐레이터 김현진의 표현대로 '즐겁고 다정하게, 무해하고 음탕하게'. 전시는 8월 4일까지. 무료관람. 

art29@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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