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는 역사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수단이었다. 현대정치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군대에는 훈련된 군인이 필요했고, 군이 필요한 병참, 무기, 장비, 정보 등을 뒷받침할 탄탄한 재정이 필요했다. 조세를 통해 재정이 확보되지 않으면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총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리였다. 육군성 장관, 해군성 장관, 재무장관은 왕을 보좌하며 국가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권력을 누린 최고엘리트들은 더 있었다.
전쟁수행 전, 전쟁수행 기간 동안, 그리고 전쟁 이후 국가를 대표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할 역할은 외교관들이 맡았다. 강대국들에 파견된 외교관들을 모은 외교클럽은 외교부로 편입되어 정부의 핵심권력부처로 떠올랐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프로이센 대사직을 거치거나 외교부장관직을 수행한 사람이 대통령까지 오를 수 있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국무장관(외교장관)은 대통령 승계서열에서 부통령, 하원의장, 상원 임시의장 다음으로 4위에 올라 있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누린다.
이와 함께 법무부도 막강한 권력을 누린다. 평화시 절도, 살인, 도난 등의 범죄자들을 사법적으로 다루고, 폭력시위를 진압해 질서유지와 안전을 책임질 경찰, 교도소, 법원을 통제할 부처는 법무부였다. 전쟁시 왕이 전선에서 직접 진두지휘하던 상황에서 국내소요의 진압과 범죄에 대한 강력한 대처 등 국내의 법질서유지는 국가운영에 필수요소였다. 그렇지 않고는 민중봉기, 쿠데타 등으로 국가가 전복될 수 있기 때문에 강력한 법질서 수단이 필요했다. 제1장관, 즉 프라임 미니스터(Prime Minster)가 법무부 장관이 겸직했던 스웨덴의 경우 국내 법질서가 무너지면 왕이 외국군대와 마음 편히 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가장 중요한 요직으로 간주되고 있다.
국방부(1차대전 이후 차차 육군부와 해군부가 통합됨), 재무부, 외교부, 법무부는 근대국가로 이행되는 시기 가장 중요한 정부부처로 자리매김하면서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고위관료의 자격을 일반인에게까지 개방한 1860년대 이후의 개혁을 거쳐 누구든 장관, 최고통치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민주화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된다.
군대조직과 정치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군대조직을 이끌던 군인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과연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바람직한 것인가, 전쟁에도 윤리가 있는가, 군인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할 때 국가는 무엇으로 그들의 명예를 지켜줄 것인가,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이 국방의무를 다한 국민들에게 약속하는 권리보장의 이론적 근거는 뭘까?
근대국가 형성과 군대
군대는 영토확장이나 국토방어에 꼭 필요한 존재다.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은 한결같이 강한 군대조직을 갖고 있었다. 스페인은 소수정예부대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잔혹한 방법으로 멕시코에서 페루에 이르기까지 잉카와 마야제국, 그리고 주변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해 지금까지 스페인어는 남미국가들의 주력 언어로 남아 있다. 포르투갈도 지금의 브라질을 일찌감치 무력함대를 보내 점령해 지금도 포르투갈어는 세계 7위의 언어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포르투갈어는 아프리카지역의 앙골라, 모잠비크 등을 포함해 총 7개국에서 사용되고 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무역을 독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대를 앞세웠다. 말이 주식회사지 국가가 파견한 군대조직이나 다름없었다. 해양을 주름잡으며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데 중요한 선봉대의 역할을 강력한 해군이 수행했다. 큰 군함과 장사정포, 파괴력 높은 대포알을 만드는 기술은 곧 국력으로 직결되었고, 군은 제국주의의 핵심 동력이었으며, 최고위직 군인들은 핵심 정치엘리트로 성장했다. 그 중 뛰어난 사람들은 제국의 황제로, 입헌군주국인 영국의 경우는 총리로 신분이 바뀌었다.
슈퍼 핑크 문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나폴레옹 동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군대를 이끈 사람들이 근대역사의 중요한 족적을 남기며 여전히 세계사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나폴레옹은 직업군인으로 시작해 황제까지 오른 사람이다. 키도 작고 정통가문 출신도 아니었기에 다른 장교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줘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단점을 전투전술로 만회하고자 종열집중 전술과 기민한 이동을 통한 지역선점 그리고 허를 찌르는 총력전 전략으로 최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제국을 격파해 나갔다. 최대전투인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는 그의 전술과 전략의 최고정수를 보여준다. 직업군인 출신이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예는 유럽에서는 그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다. 신성로마제국을 붕괴시켰고, 네덜란드의 오렌지왕가를 멸망시켰으며, 브르봉왕조의 전유물과 같은 프랑스 황제의 자리를 반체제 코르시카 보나파르트 가문이 만들어 냈으니 이는 중세 이후 귀족가문들이 통치한 유럽에서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과 버금가는 영국 장군으로는 웰링턴이 꼽힌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 어려워진 경제사정으로 프랑스에 이주하게 되었지만, 왕립승마학교에 입학해 불어와 승마기술을 익혀 인생역전의 기회를 마련했다. 장차 연합군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기마부대를 이끌고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했으니 그를 입학시켜 훈련시켜준 승마학교는 적국의 장군을 키워준 셈이다. 그가 승마학교에서 배운 프랑스어와 프랑스 장교들에 대한 지식이 장차 군사전략에도 매우 요긴하게 활용되었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분석한다. 미래가 불투명했던 웰링턴은 자신이 태어난 아일랜드에서 장교생활을 시작한 후부터 줄곧 성공가도를 달렸다. 네덜란드 영토였던 플랜더에서의 전투,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치른 인도마이소르 왕국과의 전쟁, 그리고 이후 이베리아반도에서 나폴레옹 군대와 전투, 그리고 마지막으로 워털루 전투에서의 승리까지 국내에서는 전쟁영웅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정치에 몸담고 조지4세와의 오랜 친분으로 상원의장과 토리당의 수장을 거쳐 단숨에 총리직까지 오를 수 있었던 연유는 바로 프랑스의 영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영국이 제국으로 떠오르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민족적 자긍심이었을 것이다.
전통과 역사를 중시하는 귀족사회에서 몰락귀족이 군최고사령관을 거쳐 총리까지 오른 예는 영국역사에서 전무후무하다.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다시 왕정국가로 회귀한 프랑스와 달리 동시대에 영국 보수당의 뿌리를 내리게 한 로버트 필(Robert Peel)의 정치적 멘토로 활동한 웰링턴은 영국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조지 워싱턴 |
군인의 정치참여
군 총사령관으로 영국과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초대 대통령으로 만장일치로 추대받은 조지 워싱턴은 웰링턴과 버금가는 미국의 영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역사가들은 군인으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보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실천한 정치적 행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워싱턴은 자신의 치아가 하나도 남지 않아 의치를 사용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임기가 끝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재선을 마칠 때 쯤 부통령과 장관들은 그에게 3선을 요구했다. 당시 부통령 존 아담스와 재무장관 알렉산더 헤밀턴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연방당(Federalist Party)과 국무장관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을 중심을 활동한 민주공화당(Democratic Republican Party)의 대립적 정치에서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국정에 임해 양측에서 모두 그를 3선대통령으로 점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초대 대통령들은 자신의 정치를 펼치겠다는 욕심이나 정치적 혼란 등을 수습능력 부재로 독재로 흐르거나 실패한 대통령이 되기 쉽다. 초기 대통령의 실패로 민주주의를 처음 실험한 국가들이 쿠데타, 혹은 내전으로 치닫는 경우는 근대역사에서 쉽게 발견된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조지 워싱턴 이후 두명의 전쟁영웅이 대통령으로 바로 직행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북군 장군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는 링컨 서거 후 치러진 첫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 인기를 바탕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승리로 '전쟁영웅은 선거에서 패배하지 않는다'는 공식이 그랜트에 의해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다. 남북전쟁 이후 국가재건(Reconstruction)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흑인과 유태인의 공무원임용, 부패공무원 및 무능공무원 해고법 등을 추진해 행정개혁을 전쟁전처럼 화학적 통합도 이루어냈다. 2차 대전의 영웅이자 연합군 사령관으로 노르망디상륙을 성공시키며 파죽지세로 프랑스를 나치치하에서 해방시키고, 베를린까지 함락시키며 전쟁영웅이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우어 장군도 '전쟁영웅은 선거에서 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다시 한번 입증해 보인 장본인이다. 루즈벨트와 트루먼이 통치한 민주당 20년 장기집권을 끝내고 공화당의 8년 집권의 기틀을 마련했다.
전쟁은 두 얼굴을 가진다. 승리한 국가의 장수는 영웅이 되지만, 패배한 국가의 장수는 역사의 수치가 된다. 이뿐 아니다. 전쟁의 승패 뒤에는 전사한 이름없는 병사들의 무덤과 부상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상이군인이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지휘관은 전쟁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지만, 영웅들을 위해 희생한 사병들을 위해서는 어떤 예우를 국가는 해주어야 하는가?
군인에 대한 국가예우의 근거
웰링턴 장군은 국가가 군인들에 대해 어떤 예우를 해 주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1869년 출판된 웰링턴의 말 (The Words of Welling, Collected from despatches, letters, and speeches, with anecdotes) 14쪽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 나는 이 나라에서 영국 군인의 생명과 건강만큼 귀중한 것은 없으며, 병원에 있는 군인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존하기 위해 국가가 모든 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머레이 대령에게 보낸 편지, 1803년 8월 21일).
웰링턴이 보여준 장병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장병을 위한 국가의 역할을 잘 담아낸다. 징병제가 보편화되면서 국방의무를 다한 국민에게 국가는 어떤 의무를 지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로 진행되면서 민주화의 요소인 참정권 확대, 봉급지급과 복지의 제공, 기술교육제공, 취업가산점 등 희생과 헌신에 대한 대가로 제공하는 것이 점차 보편화 되기 시작했다. 국방의무를 제공하고 그들이 받는 혜택에 대해서 앤서니 기든스는 "지배의 변증법"(dialectics of control)으로 설명하고 있다(Giddens, A. (1982). 'Power, the Dialectic of Control and Class Structuration', in Profiles and Critiques in Social Theory. Contemporary Social Theory. Palgrave, London). 국가는 국방의무를 요구하는 통제권을 행사하기 위해 국민들로부터 동의가 필요하고 이를 위한 보상으로 권력의 일정한 양보가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전쟁(warfare) 이후 복지제도(welfare)에 대한 요구가 2차대전 이후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영국에서 처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음도 불구하고 노동당을 이끈 클리먼트 에틀리(Clement Attlee)가 승리한 주요 원인은 국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대한 상응적 요구라는 시대적 요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의 윤리와 의무를 규정한 국제법의 탄생
전쟁은 영웅을 탄생시키기도 하지만 인권파괴라는 어두운 면도 함께 내포한다. 어떻게든 승리하기 위해 장병들을 잔인하고 무자비한 살육과 파괴를 강요하며 전쟁범죄자를 양산해 내는 것이 전쟁이기 때문이다. 승리에 집착한 나머지 정보를 얻기 위해 포로를 잔인하게 고문하거나, 실험실로 보내기도 하고, 굶주림과 추위에 내몰기도 하며 강제노동을 시키거나, 부상자를 방치하는 비인간적인 행위가 인류역사 전쟁에서 되풀이 되어 왔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앙리 뒤낭(Henry Dunant)이 주창해 환자의 보호와 비전투원에 대한 보호를 규정한 1864년 체결되어 발전된 제네바 협약(Geneva Conventions)은 전쟁국의 의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쟁은 아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Jus ad bellum, Jus in bello 원칙
제네바 협약은 전쟁의 참상에서 비전투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조항을 담는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분한다. 즉 하나는 전쟁에 참가해 승리를 목적으로 싸우는 전투군인과, 또 다른 하나는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 그리고 전쟁에 참가했다가 적국에 생포된 포로, 부상을 당해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 등을 포함한 비전투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제네바 협정은 전쟁에 참가하는 전투군인은 '전투의 범위 밖에 있는 자와 전투행위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자는 보호를 받아야 하고 존중되어야 하며, 인도적인 대우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도의상의 요청에 의거하여 부상병·조난자·포로·일반 주민 등의 보호를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이 정신이 바로 Jus in bello, 즉 전쟁 중 전쟁국이 따라야 할 의무규정이다.
장자크 루소는 앙리 뒤낭이 주창한 인도주의에 이론적 배경을 깔아준 철학자다. 루소는 그의 저서 사회계약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전쟁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국가와 국가의 관계이며, 여기에서 개인은 인간으로서가 아니고 시민으로서도 아니며 단지 병사로서 우연히 적이 되는 것"이며 또한 "전쟁의 목적은 적국을 격파하는데 있으므로 그 방위자가 무기를 손에 들고 있는 한 이를 살해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순간적 또는 적의 도구의 기능을 버리고 다시 단순한 인간으로 되돌아간 것이므로 이제 그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
전쟁이 더 이상 인권사각지대로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함께 전쟁개시에 대한 까다로운 요구도 국제사회의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다. 1919년 국제 연맹 규약과 1928년 체결된 파리 조약(브리앙-켈로그 조약, the Briand-Kellogg Pact)은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2차대전이 끝나고 1945년 채택한 유엔 헌장에는 "유엔 회원국은 국제 관계에서 위협이나 무력 사용을 삼가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다른 국가(또는 국가 집단)의 공격에 대응하여 개인 또는 집단적 자위권만 행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헌장 제7장에 기초하여,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또는 침략 행위에 대응하여 집단적 무력 사용을 결정할 수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일어난다면 방어적 전쟁만 인정하고, 전쟁을 일으킨 국가는 국제사회의 비난과 전쟁개시국의 불명예를 안고 후대까지 살아가야 한다. 바로 이 정신이 Jus ad bellum, 즉 국가가 전쟁을 일으킬 권리규정이다.
[서울=뉴스핌] 이형석 기자 = 박성재 법무부 장관(앞줄 오른족 세번째 부터),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 관련 입법청문회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2024.06.21 leehs@newspim.com |
군의 명예, 국민의 신뢰
미국 군사력 평가기관 글로벌파이어파워(GFP)가 최근 내놓은 '2024 글로벌 파이어파워'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 대상국 145개국 가운데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에 이어 5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GFP 군사력 순위는 2013년 9위, 2014년 7위로 꾸준히 상승했으며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6위를 유지해왔다. 우리는 아직 믿기 어렵지만 세계는 이미 대한민국이 명실공히 세계적 군사국가로 부상했다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세계적 군사강국으로 부상한 대한민국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의 명예를 지켜주며, 상응한 대우와 보상으로 사기를 북돋아 주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야할 시기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다가 생긴 사고나 보고체계의 문제는 엄정한 수사와 사법적 절차에 따라 한점의 의혹없이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군인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정치의 조롱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군인을 포토라인에 세워 명예를 실추시키고, 국회 상임위에서 망신을 주거나, 국회 안팎에서 지휘부에 대한 찬반으로 나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국가가 군의 명예를 지켜주지 못하고, 국민이 군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군인은 더 이상 국가에 충성하거나, 국민을 충심으로 지켜줄 마음이 생겨날 리가 없다는 점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미래의 영웅은 평화시 명예존중과 신뢰, 그리고 상응한 보상과 대우의 기초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역사적 교훈을 통해 되새길 필요가 있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최연혁 교수. 2024.01.15 mironj19@newspim.com |
*필자 최연혁 교수는=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