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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전문기자 최헌규의 리얼차이나] <36> 탄생 120주년 위업, 덩샤오핑이 쏘아올린 중국 기술굴기

기사등록 : 2024-08-1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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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최헌규 중국전문기자=  8월 22일 덩샤오핑 탄생 120주년을 기리는 일에 중국 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미국의 기술제재가 격화하는 때에 덩샤오핑(邓小平, 등소평) 조명 작업 가운데 특히 과학기술 분야의 '위대한' 공적이 강조되는 점이 흥미롭다.

중국에는 1949년 신중국 수립후 각각 전(專, 생산력 우선)과 홍(紅, 이념 중시)의 대립이 격렬했다. 전은 경제발전을 중시하는 실용주의 노선이고 홍은 계급투쟁에 경도된 좌경 노선이었다.

덩샤오핑은 언제나 전의 실용 노선을 추종했고 그때문에 문화대혁명(1966년~1976년)기 까지 잦은 실각과 함께 모진 핍박을 겪었다. 그래도 덩은 끝내 생산력 중시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과기를 바탕으로 경제가 발전해야 중국이 사회주의로 진행할 수 있다는게 덩샤오핑의 지론이었다. 사회주의 이행을 위해서는 생산력 제고와 상품경제 발달이 우선이라는 소위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의 골자다.

급진적 사회주의화를 꾀했던 마오쩌둥은 생산력 발전 노선(專) 맨 선두에 선 류사오치(刘少奇, 유소기)를 1호 주자파(자본주의 추종파)로 지목해 문화대혁명 기를 틈타 제거한다. 류샤오치 외에도 많은 혁명 원로들이 숙청되는데 마오는 뭔가를 예비하듯 유독 덩샤오핑만은 끝까지 살려둔다.

1976년 마오쩌둥 사후 4인방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이 주목한 것은 과기발전과 교육이었다. 특히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과 강고한 집념, 다방면의 이론 및 정책들로 인해 나중에는 '덩샤오핑 과기 사상'이라는 용어 까지 만들어진다.

[서울=뉴스핌] 최헌규 중국전문기자= 중국 베이징 중관촌 전시관이 공산당의 과학기술 분야 위업과 함께 덩샤오핑의 회의 장면이 나오는 영상 기록물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뉴스핌 촬영.    2024.08.19 chk@newspim.com

 

일설에 의하면 덩샤오핑이 문혁 종료 이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철도 분야 과학기술 전문가들을 시켜 경제의 핏줄인 철로를 놓은 것이라고 한다. 덩이 얼마나 경제발전을 중시했는지 알려주는 일화다.

당시 중국에는 부자가 되려면 먼저 철도를 건설하라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그 결과 40여년만인 2023년 말 현재 중국의 철로 총 연장은 15만 9천 킬로미터에 이르고 이가운데 고속철 길이만해도 무려 4만 5천킬로미터에 달한다. 가히 철도 굴기라 할 만하다.  

뉴스핌 기자가 2023년 1월 베이징의 중관촌을 방문했을 때 공산당의 과기발전사 전시룸의 상당부분은 덩샤오핑의 과기 사상에 대한 소개로 채워져 있었다.

전시 자료는 '과학기술은 제일 생산력이다(科学技术是第一生产力)'는 연설문과 함께 이 말이 덩샤오핑 과기 사상의 정수임을 설명하고 있었다.

광기의 대정변 문혁이 지난뒤 덩샤오핑이 과학기술과 교육을 강조하고 나면서 지식인(과기)과 인재가 다시 존중받는 세상이 왔다. 세상이 달라져 인문 과기 지식분자가 질시와 탄압의 대상에서 다시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중국에서는 1977년 겨울 가오카오(高考, 대학입시)가 부활돼 문화혁명기에 문을 닫았던 대학의 문이 다시 열린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1977년 570만명이 대학 입시에 응시해 27만 8천명의 대학 신입생이 배출됐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산시(陝西)성 옌촨 량자허 마을에 하방됐다가 돌아와 칭화대학에 입학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마오쩌둥의 공은 7이고 과는 3이다.' 4인방 척결과 함께 문혁이라는 정치 동란을 이렇게 정리하고 난뒤 덩은 더이상 문혁의 폐해와 마오쩌둥의 과오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사회주의 현대화 경제 발전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 인민의 암흑기는 더 장기화 됐을 것'이라는게 덩샤오핑의 생각이었다.

[서울=뉴스핌] 최헌규 중국전문기자= 사진= 1992년 남순강화에 나선 덩샤오핑이 과학기술 경제발전과 개혁개방을 독려하고 있다.  사진= 중국 츄스망. 2024.08.19 chk@newspim.com

 

10년 문혁이 막 끝났을 때 중국은 과학기술의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다. 덩샤오핑은 1980년대초 바이오 의약과 정보 기술을 위주로 한 하이테크 연구 개발 플랜을 발표하고 1992년 남순강화(남쪽 도시 순찰)에서 과학기술로 생산력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다.

기회있을 때마다 덩샤오핑은 '과기 발전 없이는 국제무대에서 나라의 위상을 높일수 없다'고 말했다. 경제난속에서도 중국은 1964년과 1967년에 원자탄과 수소폭탄 실험, 1970년대에 인공위성 발사(양탄일성 프로제트)에 성공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등소평은 양탄일성을 이루지 못했다면 대국 지위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개혁 개방 시기 덩샤오핑은 연설때마다 '과학기술 기초가 허약하면 적대세력의 제재 봉쇄를 막을 수 없고 평화도 유지할 수 없다'고 훈시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 말은 마치 수십년 후 불어닥칠 미국의 대중국 기술 제재를 꿰뚫어 본듯 한 발언이어서 흥미를 끈다.

당시 타임지는 덩샤오핑의 이런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1978년 개혁개방 선언 당해 년도와 1985년 두번에 걸쳐 덩샤오핑을 표지인물로 내세워 그가 주도하는 체제개혁과 대외개방을 비롯한 중국 사회 변화의 지각변동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뉴스핌 기자의 중국지인은 덩샤오핑의 과기정책에 대한 열정을 보면 기술 비전에 대해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라며 그가 만일 지금 시점에서 과기정책을 지휘한다면  반도체 AI 로봇 분야 연구개발에 엄청난 공을 들였을 것이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덩샤오핑은 1978년 3월 과학기술(과기)과 농업 기계화와 공업 국방 분야에 걸쳐 4개 현대화를 주창하면서 과기 현대화를 나머지 3개 분야 현대화의 추진체로 삼을 것을 지적했다. 4개 현대화는 마치 마법과 같이 삽시간에 중국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서울= 최헌규 중국전문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chk@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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