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일년 열두 달 중 11월처럼 '난감한' 달이 있을까. 빨주노초파남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채색의 계절이다. 원색의 단풍은 낙엽이 되어 거리를 떠돌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서둘러 월동을 준비한다.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종종걸음으로 바뀐다. 왠지 마음 한켠이 허전하고 서두르지 않으면 안될 것같다. 가을과 겨울 사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날씨 또한 그렇다. 그래서인지 11월을 소재로 한 시와 노래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명민한 시인들은 11월이 주는 시적 감성을 비껴가는 법이 없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11월은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히는' 계절이다. [본사 자료사진] 2024.11.06 oks34@newspim.com |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선택한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오세영 '11월' 전문.
시인 황지우는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11월의 나무)고 노래한다. 11월은 봄부터 가을까지 단숨에 달려온 시간을 돌아보다가 마지막 한 장의 달력을 바라보며 한숨짓게 만든다. 잎사귀를 다 떨구고 잔가지만 휑한 나무처럼 생이 난감해진다.
시인 신경림도 '갈대'에서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그는 몰랐다'고 노래했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낙엽들이 한없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서 우리네 생의 가려움을 달래주는 계절, 11월이다. [본사 자료사진] 2024.11.06 oks34@newspim.com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그래서인가. 기형도의 '빈집'은 11월을 닮았다. 시인의 마음이나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의 마음도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그룹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는 이런 계절에 '생의 가려움'을 달래준다.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쓱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내게 긴 여운을 남겨줘요/ 사랑을, 사랑을 해줘요/ 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새하얀 빛으로 그댈 비춰줄게요."
1992년 원숭이띠들로 결성됐지만 내세우는 정서는 기형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 소멸의 계절에 우리가 기댈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주저하거나 힘겨워하지 말고, 고백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순천만의 11월, 저녁 어스름 풍경. [사진 =오광수] 2024.11.06 oks34@newspim.com |
지금은 뜸해졌지만 가요계에 '11월 괴담' 때문에 긴장했던 시절이 있었다, 11월의 첫날, 가수 유재하(1987년)와 김현식(1990년)이 각각 교통사고와 간경화로 요절했다. 1995년 그룹 듀스의 김성재와 2010년 원맨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이 세상을 등졌을 때도 팬들의 충격이 컸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의 차중락, '안개 낀 장충단공원'의 배호, '하얀 나비'의 김정호가 모두 낙엽이 지는 11월에 요절했다.
'삼각지 로터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 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11월에 떠난 가수 중에서도 배호는 이 계절에 한 번쯤 꺼내 듣는 가수다. 배호는 1967년 이 노래를 발표하면서 가요계의 신인상을 휩쓸었다. 애수에 젖은 저음의 바이브레이션과 중절모에 검은테 안경을 트레이드마크로 승승장구했으나 지병인 신장염이 늘 발목을 잡았다. 만든 지 5년 만에 빛을 봤지만 팬들의 사랑이 커질수록 배호의 건강은 악화됐다. 결국 1971년 11월7일 스물아홉의 나이로 병마와 싸우다가 세상을 떴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해무에 포위된 11월의 해가 마치 보름달처럼 보인다. [사진 = 오광수] 2024.11.06 oks34@newspim.com |
그러나 배호는 여전히 장충단공원과 삼각지의 정서적 주인이다. 몰론 지금은 대통령실이 있는 정치적 요충지가 됐다. 울고 가는 삼각지는 아니지만, 현대사의 파란만장한 현장임은 분명하다. 이제 월동(越冬)을 준비해야겠다. oks34@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