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출시 이후 전 세계는 AI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천문학적 자금을 투자하며 AI 기술 패권을 강화하고 있고, 중국은 국가 차원의 전폭적 지원으로 AI 주도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AI 스타트업들은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김현철 한국인공지능협회장 [사진=한국인공지능협회] 2024.10.23 biggerthanseoul@newspim.com |
대한민국의 AI 스타트업들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과학기술 분야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은 이들에게 치명타가 됐다. 특히 정부 과제에 의존해 기술개발을 진행하던 초기 AI 스타트업들의 경우, 예산 삭감으로 인해 핵심 연구인력 이탈과 개발 중단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 일부 기업들은 이미 폐업을 선택했고, 더 많은 기업들이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
여기에 글로벌 AI 시장의 급격한 변화가 또 다른 도전이 되고 있다. GPU 수급난으로 인한 개발 인프라 부족, 인재 확보의 어려움, 빅테크 기업들과의 격차 심화 등 산적한 문제들이 우리 스타트업들을 옥죄고 있다.
많은 이들이 AI 스타트업들에게 즉각적인 매출과 수익을 요구한다. 그러나 글로벌 AI 시장은 이제 막 시작단계다. 챗GPT조차 아직 완벽한 수익모델을 찾지 못했고, 기술의 진화 방향도 여전히 불확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단기 성과만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AI 산업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오히려 지금은 우리 AI 스타트업들에게 충분한 성장의 시간을 보장해줘야 한다. 미국의 AI 스타트업들이 수년간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기술 개발에 매진할 수 있는 것은 인내심 있는 자본과 정부의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역시 자국 AI 기업들에게 충분한 유예기간을 제공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최근 정부는 소버린 AI 개발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분명 중요한 국가적 과제다. 그러나 국가 주도의 AI 개발만으로는 진정한 AI 강국이 될 수 없다. 만약 민간 스타트업 생태계가 붕괴된다면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이 예상된다.
첫째, 혁신의 둔화다. 국가 주도 AI는 안정성과 통제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어 혁신적 시도가 제한적이다. 반면 스타트업들은 과감한 도전과 실험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한다. 이러한 혁신 동력이 사라진다면, 우리나라 AI 기술의 발전은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산업 전반의 AI 활용도 저하다. 스타트업들은 각 산업 분야의 특수한 니즈를 파악하고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는데 탁월하다. 이들이 사라진다면 제조, 금융, 의료, 교육 등 각 분야의 디지털 전환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셋째, AI 인재 유출의 가속화다.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이 사라지면 창의적인 AI 인재들은 더 많은 기회를 찾아 해외로 떠날 것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국가 AI 경쟁력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
이렇다보니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인공지능 기본법의 통과가 지연될 경우,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몇 달이 국내 AI 스타트업 생태계의 운명을 가를 골든타임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미 여러 AI 스타트업들이 해외 이전을 검토하고 있으며, 핵심 인재들의 해외 유출도 가속화되고 있다.
인공지능 기본법의 조속한 통과는 AI 스타트업 생태계 보호를 위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법안 통과 이후 마련될 구체적인 지원책이다. 기본법 통과와 함께 실질적 지원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먼저 AI 개발 인프라 접근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현재 GPU 수급난으로 인한 비용 부담이 스타트업들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검증된 클라우드 서비스를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이들은 이미 충분한 GPU 자원과 최신 AI 개발 환경을 확보하고 있으며, 전 세계 AI 기업들이 신뢰하고 사용하는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글로벌 클라우드 서비스 활용을 위한 GPU 바우처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현재 제한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클라우드 바우처 사업의 규모를 늘리고, AI 스타트업들을 위한 별도의 GPU 지원 트랙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정된 예산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다.
장기적으로는 국가 안보나 공공 데이터와 관련된 특수 영역의 AI 개발을 위한 최소한의 공공 인프라 구축도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제한된 영역에 국한하고, 대부분의 상용 AI 개발은 글로벌 클라우드 서비스를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AI를 형상화한 이미지 [자료=블룸버그] |
또 R&D 지원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현재와 같은 단기 성과 중심의 평가 방식으로는 AI 원천기술 개발이 불가능하다. 최소 3년, 원천기술 분야는 5년 이상의 장기 과제로 전환하고, 중간 평가도 과정 중심으로 개선해야 한다. 특히 작년의 R&D 예산 삭감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AI 분야 R&D 예산의 긴급 추가 편성도 검토해야 한다.
AI 인재 유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스톡옵션에 대한 세제 혜택을 대폭 강화하고, 스타트업 재직 AI 인력에 대한 주택 지원, 자녀 교육 지원 등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채용사다리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
이는 AI 스타트업에서 3년 이상 근무한 인재가 대기업으로 이직할 경우, 해당 대기업이 스타트업에 일정 기간의 임금을 보전해주는 제도다. 이를 통해 스타트업은 인재 유출로 인한 손실을 일부 만회할 수 있고, AI 인재들은 스타트업 취업을 커리어의 중요한 단계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병역특례 업체 지정 시 AI 스타트업에 대한 가점을 부여하고, 스타트업 근무 경력을 공공기관 채용이나 학점 이수에서 인정하는 방안도 도입되어야 한다.
글로벌 시장 진출 지원에도 힘을 보태야 한다. 해외 마케팅 비용 지원, 글로벌 AI 기업과의 협력 프로그램 운영, 해외 특허 출원 지원 등이 필요하다. 특히 동남아, 중동 등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한국형 AI 솔루션의 수출을 지원하는 패키지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
이같은 지원책들은 기본법 통과 직후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통해 즉시 도입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준비돼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물론, 산업계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여 실효성 있는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세계 AI 시장은 2030년까지 연간 약 1811조원(1조8100만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시장에서 단 1%의 점유율만 확보해도 18조원의 가치가 창출된다. 글로벌 AI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 당장의 성과나 수익에 집착하기보다는, 우리 AI 스타트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
22대 국회는 인공지능 기본법의 시급성을 인식하고 조속한 통과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 우리 스타트업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을 위한 시간이다. 이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반드시 대한민국 AI 산업의 미래를 열어갈 것이다.
◇ 김현철 한국인공지능협회장은 1984년 서울 출신으로, 머신러닝 기반 추천 알고리즘 개발회사 대표를 역임했다. 2017년 (사)한국인공지능협회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협회를 설립, 국내 최초 250개 인공지능 기술기업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전자정부 사업 '혁신성장첨단기술전' 공동주관, 국제인공지능대전 개최, 인공지능 경진대회, KOREA AI Startups 편찬 등을 추진하며 협회 발전에 기여했다. 2019년부터 현재까지 협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