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손이슬 씨의 부모님은 1960년대 북송된 재일교포다. '지상낙원'이란 말에 속아 북한에 들어간 후 거의 20년 동안 일본에 남아 있는 가족들과 교류하지 못했고, 북한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고생 끝에 이슬 씨의 아버지는 은행 지배인이 되며 살림살이가 풀렸고, 일본과의 문도 열리면서 도움을 받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집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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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북송 재일교포 출신 부모를 둔 손이슬 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손풍금 연주를 통한 재능기부로 세상을 밝히고 싶다고 말한다.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2.14 |
이슬 씨의 부모님은 당시 북한 사회에서 여자가 잘 살기 위해서는 손풍금을 잘 연주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어린 이슬 씨에게 가르쳤다.
또래 아이들이 놀 때 이슬 씨는 손풍금 연습을 했다. 작은 체구에 손풍금을 메면 몸은 보이지 않고 다리만 보여 사람들은 "손풍금에 다리가 달렸다."고 말하곤 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 보상은 대단했다. 유치원 시절인 7살 때부터 언니, 오빠들의 '충성의 노래' 모임 반주를 맡으며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반주 없이도 노래를 많이 했던 시절, 꼬마라도 반주자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어서 여기저기에서 러브콜을 보내왔다.
초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당시 손풍금 실력이 가장 뛰어났던 선생님이 있는 소년회관에 다니며 배웠다. '충성의 노래' 모임이나 학교 행사가 있을 때면 이슬 씨는 늘 반주자로 참여했다.
중·고등학교에 올라가자 부모님은 음악의 전반적인 배움을 위해 학교 기악조에 이슬 씨를 들여보냈다. 그곳에서 다른 악기들과 합주를 맞추며 음악의 폭을 넓혔고 편곡도 배울 수 있었다.
세상 모두가 그녀의 인생은 이대로 쭉 탄탄대로일 줄만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중국 사업가에게 사기를 당하며 수많은 빚을 은행에 지고 연로 보장까지 받게 되면서 집안은 몰락하고 말았다.
당시 가장 비싼 독일제 손풍금을 치던 이슬 씨는 집안을 위해 귀한 악기를 팔아야 했다. 아버지라는 배경이 없어지면서 이슬 씨는 여자이지만 군대에 나가 입당하고 대학 추천을 받아 성공하려는 자신만의 꿈을 품게 되었다.
군대에서 좋다고 하는 건 모두 알아보고 준비했다. 하지만 그녀의 키가 자라주지 않으면서 군대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군대에 떨어지고 이슬 씨는 철도 선전대에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부모님은 그런 그녀를 불러 "여기 조선 땅에는 희망이 없다. 그러니 남한으로 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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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탈북민 정착지원 기관인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 |
애지중지 귀하게 키운 딸, 자신들의 전부처럼 키운 딸이지만, 그녀의 인생을 위해 부모님이 직접 탈북을 준비해 주셨다.
탈북 후 그녀는 남한으로 가는 줄 알았지만, 그 루트는 인신매매였다. 스무 살, 그 어린 나이에 갑자기 낯선 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남자에게 시집가 아이까지 낳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신의 소식을 기다리다 돌아가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졌다.
이후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가기 위해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을 만나면 무조건 도와 달라고 애원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녀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아서였을까? 수없이 도움을 요청했던 이들 중 한 한국인으로부터 남한으로 갈 수 있는 정보를 얻게 되었고, 딸과 함께 중국을 탈출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하나원 퇴소 후 5살 된 어린 딸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숨 돌릴 새 없이 공장으로 출근해 일을 해야 했고, 퇴근 후에는 또 급하게 딸을 찾아와 보살피는 힘든 삶을 반복해야 했다. .
공장에 다니면서도 열심히 공부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중 교회의 어느 집사님 소개로 신학대학교 1학년 전도사를 소개받았다.
이후 그와 든든한 동반자로 결혼하면서 새로운 길들이 열렸다. 사느라 바빠서 잊고 있던 음악의 길이 다시 열렸다. 사실 잊었다기보다는 그동안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것이다.
남편과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어느 집사님이 "성악 레슨을 받아보지 않겠냐"고 했다.
노래는 북한에서 손풍금을 연주할 때도 한 번쯤 배우고 싶었던 과목이었다. 결혼 후 아이를 임신하며 입덧이 심한 시기였지만 열심히 준비해 결국 장로회신학대학교 성악과에 합격하였다.
신학교 1학년이었던 남편이 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하였고, 이슬 씨는 이제 대학교 성악과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다.
학생으로, 엄마로, 교회 담임 사역자 사모로 숨 쉴 새 없이 바빠 보이지만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꿈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교회에서 손풍금을 연주하며 찬양하면서 평생 하늘의 복을 나누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교회에 오는 아이들에게 손풍금, 기타, 노래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재능은 무료로 아낌없이 나누겠다는 그녀. 손풍금에 다리가 달렸다며 놀림 받던 그 어린 꼬마는 수많은 풍파를 겪으며 세상에 아낌없이 나눠 줄 준비를 끝냈다.
<뉴스핌-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jlee@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