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황혜영 기자 = "저라는 존재는 고슴도치 같았던 것 같아요. 온몸에 날을 세우고 있었는데 주변 어른들의 시간과 애정이 저를 바꿨어요. 못나고 착하지도 않은데 품어주는 어른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나라는 존재도 사랑받을 수 있구나 하는 걸요."
26일 성평등가족부 주최 가정 밖 청소년 토크콘서트 '나란히, 우리'에 패널로 참석한 안나연 씨(25)는 이같이 말했다. 이날 토크콘서트는 가정 폭력, 방임,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집을 떠난 10대·20대 초반 청소년·청년과 쉼터·자립지원기관 종사자, 정부 관계자들이 한데 모인 자리였다.
토크콘서트 내내 반복된 키워드는 '버팀목이 돼 주는 어른'이었다. 안 씨는 "둥글둥글한 성격이 아니라 상처되는 말만 골라 하는 사람이었다"며 "그럼에도 떠나버리는 대신 '그 말이 상처가 된다', '안 좋은 일 있었구나' 하고 넘어가는 친구들과 퇴소하는 날까지 곁에 있어준 이제오 선생님 덕분에 바뀔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오 서울시립청소년자립지원관 선생은 안 씨가 퇴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끝까지 곁을 지켰고 퇴소 날에는 방 정리와 짐 옮기기까지 함께했다.
서울 지역 쉼터와 자립지원관을 거쳐온 한 참석자도 "6년 동안 단기·중장기 쉼터를 거치는 동안 늘 옆에 있어주던 선생님들이 졸업과 성장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며 "끝까지 곁을 지켜주는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성장하려는 청소년이 훨씬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준혁(22) 씨는 "여러 지원이 너무 당연할 정도로 큰 도움이 됐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함께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라며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가장 큰 힘이자 가장 큰 지원이었다"고 했다.
이날 현장에서는 '자립 청년' 지원에 대해서도 거론됐다. 가정 밖 청소년 A씨(22)는 "주거 지원이 있다고 해도 막상 나와 살아보면 보증금 말고도 먹고 사는 생활비, 가전제품 같은 기초비용이 숨이 턱 막히게 다가온다"고 털어놨다.
2025년부터 가정 밖 청소년 자립지원수당이 월 50만원, 최대 5년까지 늘었지만 보증금과 생계, 최소한의 살림까지 동시에 꾸리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준혁 씨는 "의료·교육 등 분야별로 지원금 항목이 세세하게 정해져 있다 보니 어떤 청년은 자격증을 하나 더 따고 싶어도 이미 해당 항목 예산을 다 써서 막히고 다른 청년은 필요 없는 항목이 남아버리는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분야별이 아니라 개인별로 맞춰주는 지원이 된다면 자립준비청소년들이 훨씬 더 잘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A씨는 "여성용품·교통비 지원 덕분에 실질적인 어려움을 덜었고 '아이엠뱅크' 목돈 저축 지원을 통해 단순한 금전적 도움을 넘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힘'을 얻었다"며 "이 모든 과정에서 먼저 알아보고 연결해준 지역사회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15년 전 쉼터를 퇴소하고 현재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B씨(34)는 자신을 "복지 사각지대 끝에 서 있던 사람"이라며 "청소년기에 집을 나와 쉼터에서 지냈지만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설명했다. 서류상 등록된 부모 재산 때문이었다.
B씨는 "장학금이든 복지제도든 '부모 소득 재산 증빙' 제출 단계에서 번번이 막혔다. 서류만 보면 '지원할 이유가 없는 아이'였던 것"이라며 "선생님들이 몇 년 동안 서류를 모으고 설명하면서 애를 많이 써주셨다"고 말했다.
현장 종사자들의 고민도 적지 않았다. 이제오 선생은 "자립 준비를 돕다 보면 계획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일이 많지만 그래서 아이들을 혼내기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너무 끌어당기고 밀어붙이다 보면 관계가 어긋난다"며 "먼 길을 돌아가는 것 같더라도 품어주고 기다리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청소년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현장 종사자들은 '관계'의 시간을 강조했다. 허경회 충주시남자단기청소년쉼터 소장은 "분명한 건 마음이라는 문의 손잡이는 청소년이 쥐고 있다"며 "청소년이 열어야 열리는 문이라 옆에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계속 두드리며 '나는 여기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원민경 성평등부 장관은 "선생님들이 여러분이 꽃 피울 수 있게 물을 주시는 분들이라면 성평등가족부의 몫은 이 정원을 안전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일"이라며 "민간과의 연계 지원, 정부의 지원을 더 준비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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