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작가 이안리는 남들이 별로 눈여겨 보지 않는 바닷가 선박폐기물이라든가 파도에 휩쓸려나온 갖가지 잔해에 주목한다. 그리곤 그 크고 작은 잔해들을 공들여 재조합하고, 옻칠 등을 더하기도 하며 독특하면서도 감각적인 작품을 만든다. 때문에 이안리의 작품에는 오랜 시간의 흐름과 마찰, 집적이 어우러져 있다.
우손갤러리 서울이 지난 5월 28일 이안리 작가의 개인전 'After the Hull'을 개막했다. 오는 7월 25일까지 계속될 이번 전시는 이안리의 신작 타원형 회화 3점과 150호 대형 캔버스를 포함해 회화 5점, '물과 뭍' 연작 13점, 그리고 가변설치 형식의 드로잉 작업 등이 두루 나왔다. 이를 통해 작가가 삶 속에서 길어올린 다양한 물질과 시간 사이에서 발견해온 표면의 상태와, 이를 재구성한 섬세한 조형적 미감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 타이틀인 'After the Hull'은 '선체 이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안리는 배(선박)를 완성된 구조물이 아닌 오랜 시간 물과 바람, 햇빛과 염분을 견디며 천천히 닳아가는 '살갗'으로 바라본다. 바닷물과 날씨에 의해 풍화하는 화석처럼 여기는 것.
원래 선박은 바다에 장시간 머물며 부식되고, 갈라지면서 서서히 원래 형태를 잃어가기 마련이다. 그리곤 폐기된다. 그런데 이안리는 바로 그 '이후'의 상태에 주목한다. 침몰 이후,또는 방치된 이후, 시간이 지나며 페인트가 갈라지고 철이 녹슬고 층이 벌어지는 과정 속에서, 낡음은 단순한 손상이 아니라 또 다른 표면과 피부가 만들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작가는 "제게 사라짐은 단순한 손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능을 잃어가는 과정 속에서 전혀 예기치 않았던 또다른 표면이 만들어지죠. 균열이 생기고 마모가 반복되며, 녹과 염분이 쌓인 자리에는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피부가 생겨납니다. 전 그 닳고, 낡은 새 표피에 시선이 가고, 마음이 갑니다"라고 했다.
이는 사람이 아닌, 바다와 자연이 결정한 형태이자 표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고 낡은 것들을 재조합해서, 작가는 표정을 만들고 우연적인 형상을 만든다. 거꾸로 보면 배같은 형태가 된 것도 있고,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 새, 작은 잎사귀같기도 한 추상적 형태가 작가의 손길에 의해 탄생한다. 낡음과 새로움, 우연성과 필연성, 과거와 오늘이 교차하며, 버려진 선체조각들은 시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작품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상처가 많은 조각들이 제게 와서 작은 나무, 작은 존재가 되기도 하고 큰 형상이 되기도 하는데, 본래의 쉐잎은 일부러 건드리진 않아요. 생긴 그 형상을 존중하지요. 그래서 나는 편집, 즉 '에디팅'만 한다는 생각도 들곤 하지요. 바다가 절반은 하는 셈이죠"라고 했다.
천연의 귀한 재료인 옻칠로 작업하길 즐기는 이안리는 군사용 비행기 표면에 투명 옻칠을 하기도 하고, 바다에 버려진 여러 재료들로 레디메이드 작업을 하기도 한다.
수년 전부터 경남의 끝자락인 통영 바닷가를 오가며 작업하는 이안리는 서핑보드 형태로 제작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바다와 육지에 떠있거나 쓸려온 존재들을 재구성한 뒤, 검푸른 옻칠을 가하기도 해 부조 같은 평면작업을 완성한다. 질감, 촉감에 특히 예민하고, 관심이 많은 작가는 작품의 배경이 된 액자 바닥면도 직접 만든다. 결 고은 노랑, 주황 등의 실크로 직접 배경을 제작해 작품과 조응하도록 한다. 그래서 완성된 작품은 보다 감각적이고, 밀도 또한 높아진다.
작가는 깨끗하게 아무 것도 없는 무결점의 흰색보다는 비바람을 맞거나 수난을 받아 더러워진 흰색을 더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의 작업들은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라기보다, 서로 다른 작은 세계들이 포개지고 겹쳐지며 전혀 다른 세계가 완성된 것들이다. 녹슬고 벗겨진 배의 표면, 따개비, 모래, 염분, 미생물, 해조류 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든 다종다기한 물질들이 '물과 뭍' 연작의 일부 또는 전부가 된다. 물살을 가르고 몸체를 떠받치던 껍질들은 기능을 잃은 채 바닷 속을 떠돌다가 작가의 손을 거쳐 다시 화면 위로 떠올라 전시장에 걸려 '미묘한 재조합의 미'를 뿜어낸다.
이안리에게는 색 또한 오랜 시간 부식되고 닳아가며 생긴 '흔적'에 가깝다. 가늠되지 않는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갈라진 페인트 틈 사이로 드러나는 층위, 녹슨 철이 만든 얼룩, 마모된 표면이 가진 불규칙한 질감들은 하나의 화면 안에서 서로 충돌하거나 화합하며 마침내 자리를 잡는다.
작가는 데뷔 이래 끈질기게 표면 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해왔다. 종이 위에 수없이 연필선을 반복해 긋고, 모래를 화면 위에 문질러 바른 뒤 다시 덮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로써 그의 화면은 하나의 이미지를 향해 가기보다 마찰과 손상, 축적과 제거가 반복된 흔적들로 남는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가변설치 드로잉 작업 '매듭 이후의 시간'은 재료를 다루는 작가의 보다 직관적인 태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갤러리 1층과 2층을 가로지르는 벽면 위에 수직으로 길게 설치된 드로잉과 낚싯찌, 브론즈 모빌, 그리고 공간 위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평면과 입체, 재료와 이미지의 경계를 넘어서며 하나의 시적이고 서정적인 풍경을 만들고 있다.
미술비평가 김지연은 이번 전시에 대해 "이안리에게 표면은 단순히 외부를 감싼 표피가 아니라, 내부에서 밀어붙인 힘이 시간을 들여 도달한 자리,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가장 첫 번째 장소다. 그의 작업은 삶이 표면으로 밀려나온 상태를 다루는 작업"이라며 "작가의 표면은 단순한 형식적 결과가 아니라 관계와 시간, 마찰의 감각이 퇴적된 자리"라고 평했다.
그의 작품은 제목도 흥미롭다. '나는 모든 것이 가라앉고 난 뒤 끝내 남는 것입니다', '나는 침몰 이후에도 자라납니다'와 같은 타이틀은 형태가 사라진 이후에도 끝내 남아있는 것들을 암시하고 있다. 그 가장자리에서 벌어진 틈과 새로 태어난 틈과 피부 사이로 작가의 섬세하지만 끈질긴 숨결이 은은하게 들린다.
▲이안리(b.1985)작가는?= 파리 국립 고등미술학교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자연과 일상 속 작은 존재들인 씨앗, 잎, 꽃, 과일, 불빛, 새 등을 세심히 관찰하며, 이들의 순수한 본질을 조형적으로 균형감있게 표현해왔다. 그리기, 꿰매기, 엮기, 긁어내기 등 다양한 제스처를 활용해 작고 고요한 존재와 순간에 생명력을 불어넣길 즐긴다. 자연물(식물, 해양 부산물 등)을 자주 다루면서 발생하는 '몸짓들'을 발현해 이를 드로잉, 회화, 콜라주, 조각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구조화시킨다.
또한 이안리의 작업은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추상적 단편들이 된 모티브들은 기억을 되살리는 통로가 돼 무의식 속 형태들이 감각을 부추킨다. 하나의 오브제로서 여러 흔적들은 작가가 거쳤던 영토와 깊이 연관돼 있다. 결국 그의 작업은 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화, 겉과 속, 여행지와 보금자리의 다양한 비밀과 결들이 켜켜이 포개지고 쌓이며 오묘한 빛을 발한다. 전시는 7월 25일까지. 무료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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