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철학을 전공한 졸업생들은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동년배보다 취업해 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24년 기준 미국 컴퓨터공학 전공자 실업률은 7%, 철학 전공자 실업률은 5.1%. '취업 안 되는 전공'의 대명사였던 철학이 '취업 보장 전공'이었던 컴퓨터공학을 앞질렀다.
배경엔 엔트로픽, 구글 딥마인드 같은 AI기업들이 '철학자'라는 직함으로 사람을 뽑는 흐름이 있다. 오픈AI의 샘 올트먼도 챗GPT의 행동 규범을 만들 때 수백 명의 도덕 철학자를 자문했다고 밝혔다.
물론 여전히 AI기업이 압도적으로 많이 뽑는 건 엔지니어이고, 철학자 채용은 소수의 자리다. 그럼에도 왜 그 자리가 생겼는지는 따져볼 가치가 있다. AI가 인간에게 남겨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노동 가치는 대체로 얼마나 정확하고 빠르게 '답하는가'에 있었다. 하지만 AI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존 지식을 찾아 정리해 답하는 일은 AI의 몫이 되었다. 대신 AI가 아직 못하는,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 남았다. 개념이 애매한 지점을 짚고, 원칙이 충돌하는 지점을 찾고, 그 충돌을 풀 기준을 세우는 일. 수천 년간 철학이 해온 작업이 갑자기 실용적 가치를 갖게 됐다.
AI기업에서 철학자들의 실제 업무를 보면 막연한 추상적 얘기가 아니다.
엔트로픽은 자사 AI 클로드가 어떤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정리한 문서를 만들어 훈련 과정에 반영하는데, 이를 '헌법'이라 부른다. 이 문서를 함께 쓴 철학박사 조 칼 스미스는 정렬 연구의 진짜 병목은 기술력이 아니라 철학적 명료성이라 말한다. 이 헌법의 핵심 저자인 아만다 아스켈에 따르면, 이 문서는 "정직해라", "해롭지 않게 행동해라" 같은 원칙을 선언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사용자가 위험한 상황을 암시하며 동시에 정보를 요구할 때처럼, 원칙들이 실제로 충돌하는 순간 무엇을 우선할지 판단 기준까지 담아야 한다. 코딩도 도덕 훈계도 아닌, 모호한 가치를 작동 가능한 규범으로 옮기는 작업이다.
이 지점이 최근 논의되는 'AI입헌주의'와 만난다. 국가를 헌법으로 다스리듯, AI도 미리 정한 원칙에 따라 일관되게 판단하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왜 이 방식이 필요할까? AI기업이 모든 질문에 미리 정답을 정해둘 수 있다면 헌법은 필요 없다. 문제는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클로드나 챗GPT는 하루 수억 건의 질문을 받고, 그중 다수는 개발자도 예상 못 한 상황들이다. 이 경우의 수를 규칙으로 다 적어 둘 수 없으니, 대신 판단 기준이 되는 상위 원칙, 즉 헌법을 AI에게 심어둔다는 뜻이다. 처음 보는 질문 앞에서도 "내 헌법에 따르면 이렇게 판단해야 한다"고 AI가 스스로 추론하게 만든다는 의도다.
AI 헌법의 필요성은 앞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다. AI가 답하는 도구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정을 짜고 이메일을 보내는 에이전트로 넘어가면서, 대응해야 할 상황의 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고 개별 규칙으로 대응하는 방식은 더 빨리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현재로서 최선은 판단의 근거인 헌법 자체를 더 정교하게 다듬는 것뿐이다. AI기업들이 앞으로도 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AI헌법과 국가 헌법은 다른 점이 있다. 국가 헌법은 국민투표나 국회 심의, 개정 절차를 거치지만 AI 헌법은 누가 어떤 정당성으로 썼는지 불투명하다. 몇몇 회사 직원의 원칙이 전 세계 수억 명의 판단 기준이 되는 셈이다. 앤트로픽이 2023년 시민 약 1000명의 의견을 모아 만든 헌법 초안을 자체 헌법과 비교해봤다. 정당성의 공백을 메워보려는 실험적 시도였다. 두 문서는 개념적으로 절반 가량 겹쳤다.
세계경제포럼의 '2025 미래직업보고서'는 AI와 빅데이터 관련 기술이 빠르게 성장하는 동시에, 창의적 사고력과 유연성 같은 인간 고유의 역량 역시 핵심으로 남을 것이라 전망한다.
결국 AI기업들이 철학자를 찾는 이유와, 미래에 살아남을 인간의 역량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같은 답을 가리키고 있다. 코딩이나 연산처럼 AI가 잘하는 일이 아니라, 가치가 충돌하는 순간에 판단하고 모호한 개념을 정리하며 그 판단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영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철학과는 예산 삭감의 첫 대상이 되고 있고, 한국도 올해 한 대학이 철학과 모집 단위를 없앴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그 철학이 훈련시키는 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문송이냐 문영이냐 단순히 개인의 진로문제로만 읽을 일이 아니다. AI시대 우리의 미래 또한 거대한 질문 위에 놓여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하민회 이미지21대표(미래기술문화연구원장) =△경영 컨설턴트, AI전략전문가△ ㈜이미지21대표 △경영학 박사 (HRD)△서울과학종합대학원 인공지능전략 석사△핀란드 ALTO 대학 MBA △상명대예술경영대학원 비주얼 저널리즘 석사 △한국외대 및 교육대학원 졸업 △경제지 및 전문지 칼럼니스트 △SERI CEO 이미지리더십 패널 △KBS, TBS, OBS, CBS 등 방송 패널 △YouTube <책사이> 진행 중 △저서: 쏘셜력 날개를 달다 (2016), 위미니지먼트로 경쟁하라(2008), 이미지리더십(2005), 포토에세이 바라나시 (2007)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