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양태훈 기자 = 국내 반도체주가 미국 빅테크의 인공지능(AI) 투자 회수 우려에 급락했다. 여기에 중국의 메모리 증설과 반도체 장비 국산화 우려가 겹치면서 한국 증시의 '샌드위치 위기'가 부각됐다. 다만 증권가는 실적 훼손보다 밸류에이션과 수급이 먼저 흔들린 조정으로 보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8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732.09포인트(10.84%) 급락한 6023.66에 거래를 마쳤다. 코스닥지수는 59.01포인트(7.72%) 내린 705.85를 기록했다. 코스피가 하루 10% 이상 하락한 것은 2000년 이후 이번을 포함해 다섯 차례다.
증권가는 미국 빅테크의 AI 투자 회수 우려를 1차 요인으로 지목하면서도 낙폭을 키운 것은 반도체 시가총액 집중도와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라는 국내 수급 구조였다고 분석했다. 실적 훼손을 확인할 근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진단이 우세하다.
조수홍 NH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국 증시 변동성이 금융위기 당시를 상회하는 수준까지 확대됐다"며 "명확한 악재 요인이 존재하지 않고 펀더멘털이 아닌 수급이 주도하는 장세에서 반복된 급락이 투자 심리를 위축시켰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최근 한 달간 삼성전자 주가는 25%, SK하이닉스 주가는 33% 하락했다.
◆ 실적 웃돌아도 주가 하락…투자 회수 시점이 변수
이번 우려의 초점은 AI 수요 둔화가 아니라 투자 자금의 조달 비용과 회수 속도에 맞춰져 있다. 지난주 실적을 발표한 빅테크들이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내고도 주가가 밀렸다는 점이 근거로 꼽힌다.
앞서 알파벳은 2026년 설비투자 전망을 기존 1800억~1900억달러에서 1950억~2050억달러로 상향했다. 올해 2분기에만 449억달러를 집행하면서 잉여현금흐름은 -59억달러로 전환했다. 실적 자체는 시장 기대를 웃돌았지만 투자 증가 속도가 내부 현금창출력을 앞지르기 시작했다는 점이 부각되며 주가는 약 7% 하락했다.
인텔도 AI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연간 설비투자 전망을 180억달러에서 200억달러 이상으로 높인 뒤 정규장에서 7.9% 떨어졌다. 실적 발표 직후 올랐던 주가가 투자 부담과 현금 흐름 희석 우려에 방향을 되돌린 셈이다.
채권시장 지표도 함께 움직였다. 지난 24일 기준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4.68%를 기록했다. 메타의 5년 만기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약 73bp(1bp=0.01%포인트)로 우량기업 125곳으로 구성된 CDX 투자등급지수(약 52bp)보다 21bp 높다. 하이퍼스케일러의 투자등급 채권 발행액은 2015~2024년 평균 280억달러에서 올해 2400억달러로 늘어날 전망이다. 개별 기업의 신용위험이 시장 전반의 위험보다 비싸게 평가되는 구간에 들어섰다는 의미다.
시장의 평가 기준이 투자 규모에서 회수 시점과 현금흐름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보영 교보증권 연구위원은 "AI 산업의 문제는 수요 부족이 아니라 자본비용 상승과 투자 회수 속도의 불일치"라며 "최근 반도체 주가 하락은 업황 피크아웃보다 AI 인프라 투자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의 조달비용과 회수기간에 대한 재평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분석했다.
◆ 시총 절반이 반도체…기계적 매물이 낙폭 키워
미국발 우려는 글로벌 공통 변수지만 국내 증시 낙폭은 두 자릿수까지 벌어졌다. 증권가는 그 배경으로 반도체 시총 집중도와 레버리지 상품 구조를 함께 지목했다.
증권가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상회하는 상황에서 반도체 심리 위축은 지수 전체의 하락으로 직결된다"며 "가장 직접적인 타격은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와 신용융자의 숏 감마 효과에서 기인했다. 하락 시 기계적인 매물을 유발하는 구조가 낙폭을 인위적으로 증폭시켰으며 이는 펀더멘털 훼손보다 수급 과잉 해소 과정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지난 5월 말 국내에 상장된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는 매일 목표 배율을 맞추기 위해 리밸런싱에 나선다. 주가가 내리면 배율을 유지하기 위해 기초자산이나 선물을 추가로 팔아야 하는 구조다. 하락이 매도를 부르고 매도가 다시 하락을 부르는 흐름이 반복된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출시 이후 장 마감 직전 매물이 몰리며 변동성이 지속해서 커지자 금융당국은 기본예탁금을 10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상향하기로 했다. 최소 매매단위 확대 조치도 조기 도입을 추진하기로 했다. 기계적 매매를 줄이고 종가 부근의 비정상적인 변동성을 완화하겠다는 취지다.
김현 다올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은 "외국인의 반도체 중심 매도와 레버리지 ETF의 기계적 매도가 하락을 증폭했다"며 "레버리지 ETF가 급락의 근본 원인은 아니지만 하락 시 기초주식과 선물을 추가 매도하는 리밸런싱 구조이기 때문에 변동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내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상품 출시라는 고유 여건도 변동성을 확대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며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의 절대규모(AUM)는 이미 6월 말 대비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는데, 정부의 규제 강화와 AUM 감소로 변동성 영향력은 점차 완화될 것"이라고 전했다.
외국인 수급도 낙폭을 키운 경로로 꼽혔다. 실제 고대역폭메모리(HBM) 주문 감소가 확인됐다기보다 엔비디아와 빅테크 주가 조정이 한국 메모리주에 대한 밸류에이션 동조화와 외국인의 대리자산 매도로 전이됐다는 것이다. 외국인의 전기전자 업종 중심 조 단위 순매도가 이날 낙폭을 키운 핵심 수급 경로로 분석된다.
◆ 中 노광장비 2026년 5대…"꼬리가 몸통 흔든 격"
미국발 우려에 중국발 공급 확대 경계감이 겹친 점도 낙폭을 키운 배경으로 꼽힌다. 다만 두 재료가 겨냥하는 시점은 다르다는 것이 증권가 진단이다.
중국 최대 D램 업체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지난 27일 중국 본토 증시에 상장했다. 주가는 공모가 대비 466% 올랐다. 대규모 자금 조달로 공격적인 증설 여력을 확보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범용 D램 공급과잉 우려가 부각됐다. 월 24만장 수준인 CXMT의 D램 생산능력은 수년 만에 60만장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산 액침형 심자외선(DUV) 노광장비 생산 소식도 같은 시점에 전해졌다. 미국의 장비 수출 규제로 막혀 있던 생산 병목이 풀릴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됐다. 다만 생산 목표는 SMIC와 CXMT를 상대로 2026년 5대, 2027년 20대 수준이다. ASML이 지난해 출하한 액침 DUV 131대와 비교하면 초기 단계다.
이종욱 삼성증권 연구원은 "중국 변수는 이번 사이클의 피크아웃 시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음 사이클 저점의 깊이에 대한 논쟁"이라며 "중국 DUV가 노광장비 기업을 넘어 미국 반도체 주가 하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김 본부장도 "CXMT 상장과 중국 노광장비 국산화는 현시점에서 가까운 미래의 이익 위협으로 보기 어렵다"며 "중국의 점유율 확대 가능성을 부각시킨 심리적 촉매 정도"라고 평가했다.
◆ 이익 전망 유지되면…현재 가격대가 지지선
반면 주가가 급락하는 동안 메모리 업황 전망과 주요 기업의 이익 전망치는 견조하게 유지됐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주가 급락으로 밸류에이션 부담이 오히려 완화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2027년 예상 주가순이익배율(PER)은 삼성전자 3.7배, SK하이닉스 3.9배 수준까지 낮아졌다. 코스피200의 12개월 선행 PER도 5.3~5.7배까지 내려와 이익 전망이 유지된다면 현재 가격대가 하단 지지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동희 SK증권 연구원은 D램·낸드 공급자 재고가 3주 이하, 유통채널 재고가 5~7주라는 점을 들어 "시장 우려와 달리 메모리 공급 부족 심화 국면"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일부 낸드 현물 가격 하락을 낸드 시장 전체의 가격 하락 신호로 보는 시각은 침소봉대의 전형"이라며 "소음으로 신호를 놓치는 것을 경계한다"고 말했다.
장기공급계약(LTA) 확대도 근거로 제시했다. SK하이닉스는 향후 5년간 7500억달러 수준의 메모리 장기 공급을, 삼성전자는 브로드컴과 5년간 2000억달러 규모의 메모리·AI 칩 파운드리 협력을 발표했다. 한 연구원은 "LTA가 바꾸는 것은 최고 실적의 높이가 아니라 바닥 실적과 이익 지속성, 가시성"이라며 "메모리 평가 지표가 주가순자산배율에서 주가순이익배율로 전환되는 변곡점"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증권가는 향후 확인해야 할 지표를 세 갈래로 정리했다. 미국에서는 빅테크의 설비투자 지침과 잉여현금흐름이 관건이다. 국내에서는 HBM 출하량과 가격, 마진에 더해 일반 D램 가격 방향과 하반기 고객사 주문 가시성이 꼽힌다. 중국에서는 CXMT의 조달 자금이 실제 생산능력으로 전환되는 시점과 중국산 DUV의 양산 라인 투입 여부가 확인 대상이다.
김 본부장은 "금리 부담에 따른 하이퍼스케일러의 투자 위축이나 반도체 이익 전망의 급격한 하향이 가시화되지 않는다면 주가 회복 시도를 기대할 수 있다"며 "전고점을 향한 V자형 반등보다는 바닥권 확인 후 점진적 회복 양상으로 1차 반등 목표는 8100포인트 수준"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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