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정영희 기자 = 서울 정비사업의 속도를 높이려면 사업성을 높이는 인센티브뿐 아니라 사업 과정에서 반복되는 지연 요인부터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허가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이주비·금융비용 부담과 공사비 분쟁, 조합 갈등 등 사업 전반의 병목을 해소해야 주택 공급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
◆ 신통기획으로 빨라졌지만…"기준 바뀌면 다시 설계"
10일 서울 국회의원회관에서 대한건축학회 주최로 '서울 주택가격 안정을 위한 정비사업 활성화 방안' 세미나가 열렸다.
발표를 맡은 한은철 나우동인건축사무소 부사장은 서울시의 정비사업 인허가 단축 정책이 성과를 내고 있다고 진단했다. 서울시는 2021년 신속통합기획을 도입해 정비계획 단계부터 공공과 민간이 함께 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기존 최소 5년 안팎 걸리던 정비계획·구역지정 절차가 실제 현장에서는 1~2년 수준까지 줄어든 사례가 나타났다.
이후 주택공급 속도 촉진방안과 신통기획 2.0를 바탕으로 정비계획뿐 아니라 후속 절차까지 겹쳐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목표는 기존 약 21년이던 전체 사업기간을 12년 수준으로 줄이는 것이다.
문제는 다음 인허가 단계로 넘어간 뒤 이전에 승인받은 내용과 다른 요구가 나온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서울 영등포구의 한 재건축 현장에선 사례에서는 정비계획에 반영됐던 공공보행통로를 두고 관계부서 의견이 갈려 약 2개월이 지연됐다. 성동구 재개발 사업에서도 정비계획 때 결정한 도로 선형과 기부채납 시설에 대해 통합심의 단계에서 다른 의견이 제기됐다.
한 부사장은 "조합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사업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 인허가에서 굉장히 필요한 부분"이라며 "정비계획이나 통합심의 이후 정책이 바뀔 경우 기존 기준과 변경된 기준 가운데 무엇을 적용할지 명확히 하는 경과조치 기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서울시와 자치구, 유관기관 사이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나왔을 때 이를 신속히 조정할 별도의 중재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 시공사 선정 후 착공까지 5년…시간이 분담금 키운다
공사비 상승 자체뿐 아니라 사업이 지연되며 쌓이는 금융비용이 조합원 분담금을 키우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현대건설이 시공 중인 사업장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시공사 선정 이후 착공까지는 통상 약 60개월이 걸렸다. ▲정비계획 변경 8~12개월 ▲통합심의 12개월 ▲사업시행인가 8~10개월 ▲관리처분인가 14~18개월이 각각 소요됐다.
사업비 대여가 시작된 이후에는 금융비용도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전체 사업 지출 가운데 공사비가 약 60~70%를 차지하고, 나머지 사업경비 중 30~40%가 금융비용이다.
박영국 현대건설 도시미래가치사업3팀 팀장은 일반분양 수익이 상대적으로 낮은 서울 외곽 사업장은 용적률만 높여주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추가 이주비 등에 정부 기금이나 공적 보증을 접목해 조합원의 금융부담을 낮추면 신용등급이 상대적으로 낮은 중견 건설사까지 정비사업에 참여할 여지가 커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조합 내부 분쟁도 사업 지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조합 정관과 선거관리규정 등이 권고 수준에 그치다 보니 임원 자격이나 추천인 수 등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되고, 조합장 해임과 재선임이 이어지면서 사업 자체가 멈추는 경우가 있다.
박 팀장은 "임원 해임 발의가 내부 이해관계 충돌로 쉽게 이뤄지면 사업이 무기한 지연되고 결국 분담금 증가로 연결될 수 있다"며 표준 정관·선거관리규정과 협력업체 선정 기준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쉬운 계약 해지에 곳곳 분쟁…사업 다시 늦춰
권영준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시공사와 조합, 조합과 조합원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쟁 구조를 짚었다.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는 경쟁 입찰과 홍보 절차를 둘러싼 다툼이 총회결의 무효나 시공자 지위확인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계약 이후에는 장기간의 사업 진행 과정에서 물가가 오르거나 설계가 변경되면서 추가 공사비 분쟁이 발생한다. 총공사비를 평당 공사비만으로 정해두면 실제 물량이나 품목이 달라졌을 때 증액 기준을 찾기 어려워진다.
권 변호사는 "평당 공사비보다 공사 물량과 내역을 기준으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물가변동과 공사기간 연장, 추가공사에 따른 공사비 조정 방식을 계약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시공계약을 상대적으로 쉽게 해제할 수 있는 구조도 사업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동산 경기가 바뀌거나 다른 브랜드로 시공사를 교체하려는 요구가 나오면서 계약을 해지할 경우 다시 시공자 선정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계약 해제 요건과 손해액 산정 기준을 보다 명확히 해야 하는 이유다.
조합원 사이에서는 조합장 해임, 서면결의서 진위, 상가와 아파트 조합원의 이해관계 차이 등이 대표적인 갈등 요소로 꼽혔다. 권 변호사는 "절차적 정당성을 지켜 다수의 결정에 따라 사업을 진행하고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조합장 해임 요건과 상가·공동주택 조합원 간 협약 등에 표준화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현장서 체감하는 규제 풀어야"…이주비·입찰·분쟁조정 주문
종합토론에서는 발표에서 제기된 인허가와 사업비, 분쟁 문제를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풀어낼지를 놓고 논의가 이어졌다. 김태훈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공사비 갈등이 법원 소송으로 넘어가기 전에 해결할 수 있는 분쟁조정 절차의 실효성 강화를 주문했다.
김 변호사는 "법원까지 소송으로 가서 장기화되지 않도록 미리 분쟁을 조절할 수 있는 기구가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며 "계약 단계부터 내역을 보다 구체적으로 만드는 지원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설계가 충분히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당가로 계약했다가 설계 변경 뒤 분쟁이 발생하는 문제를 줄이기 위한 조치다.
안승상 DL이앤씨 강남사업소 소장은 정책이 공급 활성화를 내세우면서도 이주비 규제 등 현장에서는 사업을 늦추는 제도가 동시에 적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30억~40억원을 넘는 아파트에서도 이주비를 6억원으로 막으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는 것조차 부족한 경우가 있다"며 "기부채납과 각종 공공기여 역시 사업성을 고려해 부담 가능한 수준에서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영상 현대엔지니어링 도시정비영업실 소장은 인허가 단계에서 새 정책과 지침을 뒤늦게 알게 되거나 기관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문제가 병목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법률과 조례, 정책·지침, 심의위원과 인허가 기관의 의견을 온라인 플랫폼에 축적하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사전 검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신 소장은 "정비구역 지정 직후 실제 구역 면적을 측량해 후속 단계에서 면적 차이로 설계를 다시 하는 문제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시공사 참여 저변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이재은 포스코이앤씨 도시정비영업그룹 그룹장은 "일부 사업장에서 수백억원에서 최대 1000억원에 이르는 입찰보증금이 요구되고, 추가 이주비 조달 과정에서도 건설사 신용등급에 따라 금리 차이가 벌어지면서 정비사업 수주가 대형사에 집중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입찰보증금을 적정 수준으로 제한하고 추가 이주비에 공적 금융지원을 확대하면 중견·중소 건설사의 참여를 늘려 정비사업 공급 기반을 넓힐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정비사업의 속도만 높이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놨다. 분쟁이 소송으로 이어질 경우 수년간 사업이 지연되는 만큼 조정·중재 등 대체적 분쟁해결제도(ADR)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러 정비사업이 한꺼번에 추진되면 대규모 이주 수요가 발생하면서 전월세시장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짚었다.
박효철 국토교통부 신도시정비지원과장은 "이주비도 중요하지만 이주해 나갈 집이 있는지도 중요한 문제"라며 "서울뿐 아니라 경기·인천과 협력해 입주 물량과 전월세시장 상황을 함께 고려하는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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