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서영욱 기자 = SK하이닉스가 40조원 규모의 자사주 취득·소각이라는 국내 자본시장 사상 최대 규모의 주주환원에 나서면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경영 리더십도 새로운 변곡점을 맞고 있다.
2012년 시장의 우려 속에서 하이닉스를 인수하고 불황에도 투자를 멈추지 않으며 반도체를 SK그룹 최대 성장축으로 키워낸 최 회장이 이제 성장의 과실을 주주와 나누는 단계까지 경영의 보폭을 넓히고 있어서다.
최근 최 회장은 SK하이닉스 주식의 장기 보유를 권한 데 이어 직접 약 49억원어치를 사들이며 기업가치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여기에 SK하이닉스가 대규모 성장투자를 지속하면서도 잉여현금흐름(FCF)의 50% 이상을 주주에게 돌려주기로 하면서 SK의 자본배분 기조도 '투자와 환원'이라는 두 축으로 선명해지고 있다.
2012년 '과감한 베팅'으로 시작한 최 회장의 하이닉스 경영이 14년 만에 성장과 투자에 이어 주주가치 제고까지 아우르는 단계로 확장됐다는 평가다.
SK하이닉스는 전날 이사회를 열고 40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취득해 전량 소각하기로 했다. 동시에 2025~2027년 누적 잉여현금흐름(FCF)의 50% 이상을 주주에게 환원하기로 했다. 기존 'FCF의 50% 범위 내'였던 기준을 '50% 이상'으로 높여 앞으로 투자 후 남는 현금의 절반 이상을 주주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13조 하이닉스에 베팅한 최태원…14년 만에 AI 메모리 선두로
SK하이닉스가 40조원을 주주에게 돌려줄 만큼 성장하기까지는 2012년 최 회장의 하이닉스 인수 결단과 이후 이어진 대규모 투자가 출발점이 됐다.
SK가 인수를 추진할 당시 하이닉스는 오랜 채권단 관리와 잇단 매각 실패를 겪은 데다 글로벌 반도체 업황마저 악화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인수전 단계부터 인수 이후 3~4년간 연구개발(R&D)과 시설투자 계획을 마련하도록 주문했다. 회사를 인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추가 투자를 통해 성장시키겠다는 판단이었다.
SK 편입 이후 실제 대규모 투자가 이어졌다. 이천 M14·M16과 청주 M15 등 생산시설을 잇달아 구축했고 기술개발과 인수합병(M&A)에도 자금을 투입했다. 당장 큰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던 고대역폭메모리(HBM)에 대한 투자도 멈추지 않았다.
HBM 기술 개발 자체는 SK 편입 이전 시작됐지만 장기간 사업화와 투자를 지속한 결과 AI 시대가 열리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HBM2E가 엔비디아 A100에 탑재된 데 이어 HBM3·HBM3E 시장을 선점하면서 SK하이닉스는 AI 메모리 시장의 선두 업체로 올라섰다.
회사의 체급도 완전히 달라졌다. SK 인수 직전인 2011년 말 약 13조원이던 SK하이닉스 시가총액은 20일 1200조원을 넘어섰다.
올해 2분기에는 매출 79조3187억원, 영업이익 60조5426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고 상반기 누적 매출도 처음으로 100조원을 돌파했다. 14년 전 SK가 인수를 결정할 당시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업가치와 현금창출력이 커진 셈이다.
◆"팔지 말고 갖고 있어라"…투자에 '환원' 더한 최태원
SK하이닉스의 성장에 대한 최 회장의 자신감은 최근 주가와 주주가치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드러났다. 회사의 실적과 투자 확대를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가치가 주가에 제대로 반영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달 제주포럼에서 SK하이닉스 주가와 관련해 메모리 수요가 계속되는 만큼 장기적으로 우상향할 것이라는 취지로 전망했다. 그러면서 주식을 "샀다 팔았다 하지 말고 가만히 갖고 있는 게 재산 보전에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자신감은 직접 주식 매입으로도 이어졌다. 최 회장은 같은 달 30일 개인 명의로 SK하이닉스 보통주 3620주를 장내 매수하며 처음으로 직접 주주가 됐다. 취득금액은 약 49억원으로, 회사의 본질적 가치에 비해 주가가 저평가됐다는 판단 아래 책임경영 차원에서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직접 주주가 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회사 차원의 40조원 주주환원이 뒤따랐다. 최 회장이 개인 자금으로 하이닉스의 기업가치에 대한 자신감을 보인 데 이어 회사도 대규모 자사주 취득·소각에 나서면서 성장의 성과를 주가와 주주가치로 연결하려는 행보가 한층 선명해졌다는 평가다.
◆'코스피 5000' 주주가치 요구에…SK도 환원 확대
이 같은 움직임은 정부와 자본시장에서 높아진 주주가치 제고 요구와도 맞물린다. 이재명 정부는 '코스피 5000'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내걸고 상법 개정과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 일반주주 권익 강화 정책을 추진해왔다. 성장의 성과를 주주가 체감할 수 있는 가치로 연결하라는 요구가 재계 전반으로 확산하는 상황이다.
SK그룹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SK㈜는 지난 3월 임직원 보상용을 제외한 자사주 1469만여주를 전량 소각하기로 했다. 발행주식의 20%가 넘는 약 4조8000억원 규모다. 당시 SK㈜는 상법 개정 취지를 적극 반영해 기업가치와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룹 최대 성장축인 하이닉스까지 40조원 환원에 나서면서 이 같은 기조가 다른 계열사의 자본정책으로 확산할지도 관심이다. 특히 SK하이닉스 최대주주인 SK스퀘어의 기업가치가 하이닉스 지분가치에 크게 좌우되는 만큼 하이닉스의 기업가치 제고는 그룹 지배구조상 핵심 계열사의 가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54조 투자하면서 FCF 절반 환원…'투자+환원' 두 축으로
이번 결정에서 40조원이라는 숫자 이상으로 주목되는 것은 FCF의 50% 이상을 환원하겠다는 원칙이다.
단발성 자사주 매입이 아니라 필요한 투자를 집행하고 남은 현금의 최소 절반을 주주에게 돌려준다는 기준을 세웠기 때문이다. 과거 투자 확대에 우선순위를 뒀던 SK하이닉스의 자본배분이 투자와 주주환원을 함께 고려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성장투자의 고삐를 늦추는 것도 아니다.
SK하이닉스는 이달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Y2와 청주 M17에 총 54조3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미국 인디애나 첨단 패키징 공장과 차세대 HBM·D램 생산능력 확대에도 대규모 투자가 예정돼 있다.
수십조원의 미래 투자를 이어가면서 동시에 FCF의 절반 이상을 주주에게 돌려주는 하한선을 세운 것이다.
결국 최 회장의 하이닉스 경영은 14년 전과 다른 시험대에 올라섰다. 과거에는 불황에도 투자를 멈추지 않고 회사를 키우는 것이 과제였다면 이제는 막대한 현금창출력을 어디에, 얼마나 배분할 것인가가 새로운 경영 과제가 됐다.
'투자의 최태원'에서 '투자와 환원의 최태원'으로 리더십의 무게중심이 넓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은 하이닉스를 인수한 이후 필요할 때 과감하게 투자하는 경영자로 평가받아 왔다"며 "이제는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를 지속하면서 그동안의 투자로 만들어낸 성과를 주주와 공유하는 데까지 경영의 폭을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
syu@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