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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홍규 기자 = 지난주 알려진 앤스로픽의 생물학 실험실 운영 소식은 인공지능(AI) 신약 개발의 경쟁 무대가 어디로 옮겨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AI 언어 모델로 기업가치를 키운 회사가 시약과 장비를 다루는 물리적 실험실까지 갖췄다는 것은 AI 신약 개발의 성패를 가르는 요소가 모델 '밖'에 있다는 판단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업계에서는 신약 개발용 AI의 예측 정확도를 좌우하는 조건으로 '실험을 얼마나 빠르게 많이 반복하느냐'가 거론된다. AI 언어 모델은 연산량과 학습 데이터, 매개변수(훈련 과정에서 얻어지는 모델 내부 수치, 개수는 모델 규모를 의미)를 늘릴수록 성능이 오르는 규모의 법칙을 따랐지만 신약 개발에서는 실험으로만 얻을 수 있는 생물학 데이터가 예측 정확도를 결정한다는 판단에서다.
◆실험까지 갖춘 앤스로픽
앤스로픽이 올해 실험실 운영에 이르기까지 확보한 인력과 도구는 AI 신약 개발의 반복 과정에서 한 단계씩을 맡도록 짜였다. AI 신약 개발은 AI가 후보물질을 제안하면 실험으로 후보물질이 실제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확인된 결과를 AI가 다시 배우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되풀이할수록 AI의 다음 제안이 정교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회사가 4월부터 마련한 인력과 도구는 제안과 실험, 결과 전달의 3단계에 하나씩 대응한다.
*AI 신약 개발은 표적 선정과 후보물질 설계, 실험 검증으로 이뤄진 발굴 단계와 임상시험 진입 신청, 1~3상 임상, 승인으로 이어지는 전체 과정 가운데 주로 첫 영역인 발굴 단계에 해당한다. 임상에서도 AI가 환자 선별이나 결과 분석에 쓰이지만 인간에게 약을 투여해 효과와 안전성을 확인하는 절차 자체는 AI가 대신할 수 없어 당장은 AI가 맡는 역할 범위가 발굴 단계에 비해 좁다. 앤스로픽이 실험실로 겨냥하는 영역도 발굴 단계 가운데 실험 검증에 해당한다.
첫 단계인 후보물질 제안은 인력과 소프트웨어로 채웠다. 앤스로픽은 올해 4월 AI 신약 설계 스타트업 코에피션트바이오를 약 4억달러에 인수했다. 창업자들은 로슈 계열 바이오 기업 제넨텍에서 실험 결과를 AI 모델 개선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신약을 설계해 온 연구자 출신이다. 6월에는 단백질 구조 예측 AI '알파폴드'의 개발자로 2024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존 점퍼를 영입했다.
셋째 단계인 결과 전달에는 AI와 실험 장비를 잇는 연결 방식이 필요했다. 앤스로픽이 지난달 하순 내놓은 MHS(모델 하드웨어 표준)는 현미경과 로봇 팔 같은 장비가 자신의 기능과 조작 범위를 AI에 알리는 방식을 정한 소프트웨어 규격이다. 규격에 맞춰 연결된 장비는 AI의 지시대로 실험을 수행하고 측정값을 AI에 전송한다. 연결만으로는 실험이 이뤄지지 않는 만큼 둘째 단계인 실험은 자체 실험실이 채워야 했다.
앤스로픽의 에릭 카우더러-에이브럼스 생명과학 책임자는 로이터통신에 "생물학의 최종 검증은 당분간 실제 실험실 작업에 있다"며 자체 시설 확보 이유로 '속도'를 들었다. 앤스로픽의 AI 서비스 클로드가 로봇 장비를 지휘해 최소 인력으로 실험을 수행하는 방안도 시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회사 대변인은 실험실이 신약 발굴 전용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구체적 용도는 공개하지 않았다.
◆경쟁 우위는 실험 데이터
앤스로픽이 실험실까지 갖춘 배경은 언어 모델과 생물학 모델의 학습 방식 차이에 있다. 언어 모델은 인터넷 텍스트를 수집해 다음 단어를 예측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학습한다. 생물학에서는 단백질이 제대로 접히는지, 새 분자가 세포에 들어가 표적에 작용하는지, 인간에게 독성이 있는지 같은 핵심 질문에 실험 결과가 있어야 답이 나온다. 인터넷에서 수집할 수 없는 데이터가 학습의 재료가 된다.
공개 데이터에 의존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윌리엄블레어는 3월 보고서에서 공개 데이터베이스로 학습한 생물학 모델이 2020년대 초 이후 성능 향상이 둔화되는 '데이터 벽'에 부딪혔다고 분석했다. 연구 집단마다 같은 공개 자료를 쓰는 만큼 학습에 추가할 정보가 갈수록 부족해지고 모델을 키워도 학습할 내용이 늘지 않아 성능 개선 폭이 줄었다는 설명이다. 생물학 AI의 진전을 제약하는 요소가 알고리즘에서 실험 데이터 생성 능력으로 옮겨갔다는 결론이다.
공개 데이터로 얻을 수 있는 성능 개선이 줄어들면서 승부처는 실험 데이터를 얼마나 빨리 만들어내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AI 모델이 후보물질을 10만개 설계해도 어느 후보가 실제로 표적에 작용하는지는 실험을 거쳐야 알 수 있고 실험으로 확인한 결과가 많을수록 모델이 다음 설계에 반영할 정보도 늘어난다. 연간 유효 검증이 수백회인 기업과 수만회인 기업의 지식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AI 신약 개발사 리커전파마슈티컬스(RXRX)가 로봇 자동화 실험실에서 주당 약 220만건의 실험을 수행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실험 설비'로 향하는 자금
벤처 투자자들은 실험 설비 자체를 경쟁 우위로 평가해 기업가치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자동화 실험실 스타트업 릴라사이언스는 작년 10월 엔비디아 벤처 부문 등이 참여한 자금 조달로 13억달러 넘는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회사는 조달 당시 앞으로 주도권을 쥐는 쪽은 가장 큰 데이터센터가 아니라 가장 큰 자동화 실험실을 가진 기업이라고 설명했다. 회사는 올해 6월 추가 조달에서 기업가치 85억달러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알파벳 자회사 아이소모픽랩스도 실험 설비를 늘리고 있다.
승부처가 실험 데이터 생성 속도로 옮겨가는 가운데 실험 수요는 AI 도입 이후에도 늘어나는 추세다. 윌리엄블레어에 따르면 2017~2025년 대형 제약사의 전산(dry lab; 실험 없이 컴퓨터로 하는 작업 전반) 지출은 연평균 30.5% 늘었고 같은 기간 실험(wet lab; 시약과 장비로 하는 물리적 실험) 지출도 5.6%씩 늘었다. AI가 실험을 대신했다면 전산 지출이 늘어난 만큼 실험 지출은 줄었어야 하지만 두 항목이 함께 늘었다. 전산 지출 증가율이 높은 것은 2017년 당시 규모가 작았던 결과로 절대 금액에서는 실험 지출이 여전히 크다는 설명이 나온다.
실험 수요 확대는 공급망 기업 실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전자 합성 업체 트위스트바이오사이언스(TWST)는 2025회계연도(2024년 10월~2025년 9월)에 AI 관련 주문 2500만달러를 인식했다. 전년에는 같은 성격의 주문이 없었다. AI가 설계한 항체는 설계도에 해당하는 유전자를 합성해 세포에 넣어야 실물로 만들어지는 만큼 AI 신약 실험 수요는 유전자 합성 업체의 주문 증가로 먼저 나타난다. TD코웬의 7월 조사에서는 AI가 전임상 비용을 최대 70% 줄이는 대신 3~5년 안에 개발 프로그램을 10% 넘게 늘려 실험 지출 10억달러가 추가될 것으로 전망됐다.
◆규제 절차 단축 병행
실험 반복이 만드는 시간상의 우위는 규제 절차가 함께 짧아질 때 사업성으로 이어진다. 발굴 단계에서 AI가 후보물질 도출 기간을 4년에서 18개월로 줄여도 인간 대상 임상시험 준비에 최대 약 2년이 걸려 전체 개발 기간은 크게 줄지 않았다. 앤스로픽 실험실이 알려진 것과 비슷한 시점에 미국 규제기관이 임상 진입 절차 단축에 착수한 만큼 발굴 단계에서 줄인 시간이 다음 단계에서 상쇄되지 않고 개발 기간 전체에 반영될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식품의약국(FDA)이 이달 15일 참가 신청을 받기 시작한 신속 IND(임상시험용 신약 신청) 시범사업은 임상 진입 시간 단축을 목표로 한다. 제약사가 자격을 갖춘 연구기관과 협력해 IND 구성 요소를 완성되는 대로 제출하면 FDA가 순차 심사하는 방식이다. IRB(임상시험심사위원회) 심의와 시험기관 개시 준비도 필요한 경우 병행하도록 권장한다. AI를 통해 발굴을 마친 후보물질이 임상에 들어가기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그만큼 줄어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모델로 얻은 근거를 심사에서 다루는 기준도 정비되고 있다. FDA는 지난해 4월 AI 모델과 장기 칩으로 얻은 자료도 동물실험 자료와 같은 자격으로 임상 진입 심사에 쓸 수 있게 허용하는 계획을 내놨고 6월에는 모델 예측 결과를 심사 자료로 낼 때의 검증·제출 기준을 정한 지침을 확정했다. 21일에는 규정의 '동물·전임상 시험' 용어를 '비임상'으로 바꾸는 규칙도 공표했다. AI 예측을 모두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인정 범위가 넓어지는 만큼 AI 신약 투자를 둘러싼 규제 불확실성도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후기 임상 성적은 미검증
AI를 활용한 실험 반복이 성공률을 실제로 높이는지는 아직 임상 결과로 검증되지 않았다. 올해 미국임상종양학회에서 발표된 분석에 따르면 작년 12월 기준 AI 기반 치료제 후보 117개가 기업 63곳에서 임상에 들어갔고 51.3%가 1상을 마쳤으나 2상 완료는 6.8%에 그쳤다. FDA 정식 승인 사례는 아직 없고 AI로 표적을 찾고 분자를 설계한 인실리코메디슨의 렌토서팁이 7월 3상 개시 발표에 이어 9월 첫 환자 투약을 마쳐 임상 단계가 가장 진전돼 있다. 임상에 들어간 AI 약물 대다수의 약효를 판가름할 2·3상 결과는 향후 2~3년에 걸쳐 확인될 전망이다.
경제적 가치가 발생하는 지점은 발굴 비용 절감보다 후기 임상 실패 감소에 있다는 분석이 애널리스트와 컨설팅 업계에서 공통으로 나온다. 맥킨지는 21일 보고서에서 1상 진입 자산의 임상 성공률이 13% 안팎이고 신약 1개당 비용이 40억달러에 이른다고 집계했다. 발굴 단계 비용은 전체 중 일부에 그치는 만큼 AI로 발굴 비용을 줄여도 효과는 제한적이지만 2·3상 실패를 줄이면 실패한 후보에 들어가는 수억달러 단위 지출을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이다.
맥킨지가 지목한 후기 임상 실패의 원인은 분자 설계 오류가 아니라 표적 선정 오류다. 2·3상 실패의 약 4분의 1은 예측하지 못한 안전성 문제에서 나오고 표적이 질환과 실제로 인과관계가 있는지 발굴 단계에서 확인하지 못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인과관계는 세포에서 표적을 억제하거나 활성화한 뒤 질환 관련 변화가 나타나는지 관찰하는 실험으로 주로 확인된다. 앤스로픽 실험실도 AI의 예측을 세포 실험으로 검증하는 용도라는 점에서 발굴 단계에서 실패 요인을 걸러내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신약보다 클로드 성능 목적"
앤스로픽이 실험실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당장은 자체 신약보다 클로드의 생물학 분야 예측 능력이라는 것이 업계 해석이다. 회사는 올해 6월 클로드를 과학 연구용으로 확장한 클로드 사이언스를 내놨고 당시 카우더러-에이브럼스 책임자는 코딩을 직접 하지 않고 코딩 보조 도구 클로드 코드를 만들 수 없듯 전임상 연구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클로드 사이언스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회사는 제약사 고객과의 경쟁 우려를 이유로 당분간 임상시험은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제약사 고객 사이에서는 앤스로픽이 자사 신약 개발 데이터에서 이득을 볼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험실 데이터가 클로드 학습에 쓰이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AI 공급사가 자체 실험을 병행하는 상황에서 고객 데이터의 학습 활용 범위를 계약으로 어떻게 정하느냐가 제약사와 AI 개발사 사이의 새 쟁점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bernard0202@newspim.com





